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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력을 넘어서려는 과학적 참신함 - 영화 《머니볼(Moneyball)》, 2011 본문
영화 《머니볼(Moneyball)》, 2011
1)
MLB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저예산 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Oakland Athletics). 그곳의 단장인 빌리 빈(Billy Beane)이 '머니볼' 철학을 도입하여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실화를 각색했다. (실제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여러해 걸쳐 이룩한 성과를 영화의 극적인 재미를 위해서 1년 동안 벌어진 일로 압축했다고 한다... 빌리 빈 실화 -> 머니볼 책 각색 -> 영화 각색) 머니볼 철학이 담은 의미 때문에, 야구를 모르는 내가 봐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MLB영화가 아니라 NBA, NFL, EPL 영화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
이 영화에 등장한 머니볼은 '저예산 팀 입장에서 거대 구단을 돈으로 이기기는 힘드니, 보다 합리적인 평가 지표를 활용하여 저평가된 선수들을 발굴하여 성적을 효율적으로 끌어올린다.'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예일대 출신 피터 브랜드(실존인물 하버드 출신 폴 디포데스타)를 영입하여 타율 같은 낡은 지표 대신, 게임 이론과 통계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출루율 등 보다 실질적인 지표를 활용한다.
찾아보니 야구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정량화하고 과학화된 접근을 시도하는 흐름을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라 한다고 하며, SABR(The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와 metrics의 합성어라고 한다. 주로 경제학이나 수학과 같은 학문을 전공하였으며 야구에 조예가 깊은 인물들을 필두로 시작된 흐름이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각 구단에 전문가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역시 수학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쓰일 곳이 꼭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의 전공과 취미를 결합하여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보인다.
3)
머니볼 전략,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통계학적 방법론은 하나의 유행이 됐고, 오늘날 MLB 구단만이 아니라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프로스포츠 구단의 필수 역량이 되었다. 경기 내적으로는 상황에 따라 선수가 행하는 전술적인 움직임, 자신도 모르게 하는 무의식적인 습관들, 스포츠 동작을 수행할 때 신체 각 부위에서 나타나는 골격과 근육의 각도, 심박수 등의 신체 지표, 구기스포츠에서 선수가 보내는 공의 회전축 및 회전수 등 온갖 세밀한 요소들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 경기 외적으로는 평소 선수의 수면 시간과 수면의 질, 음식으로부터 섭취하는 각종 영양 성분, 휴식시간 중 피로의 회복 정도 등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구단과 매니저는 퍼포먼스 극대화를 위해 경기 내외 모든 영역에서 스포츠 선수들의 다양한 삶에 영향력을 실제적으로 행사하고자 한다. 이는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평가의 가치가 널리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평생 당신이 해온 경기에 대해 믿기지 않을 만큼 모르고 있다.(It's unbelievable how much you don't know about the game you've been playing all your life.)"
- 미키 찰스 맨틀(Mickey Charles Mantle, 1931-1995)의 말, 영화 앞부분에 등장
기존에 사용되었던 불확실하고 불필요한 기준들, 예컨대 그 선수의 외모가 어떻고, 애인이 별로니 자신감이 없을 거라느니, 혹은 느낌적인 느낌과 같은 기준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인상, 편견에 좌우되기 쉬운 탓에 선수의 실질적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과학적 방법론이 갖는 힘은 대단히 크다. 경험 과학이 지니고 있는 일관성을 바탕으로 도출된 결론은 과거를 기준으로 미래를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인 것이다.
4)
다만 우리는 그러한 합리적인 평가 기준과 평가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 이야기에서는 물리계가 작동하는 모든 방정식과 여기에 입력할 변수 값을 알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원리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경험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는 부분적으로만 경험할 수가 있다. 애초에 수집한 통계 자료라는 것은 과거의 기록이고 이것이 곧바로 미래를 예견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빌리 빈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나아가 세이버메트릭스 전략을 사용하는 구단들이 선수 영입이나 드래프트 등에서,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튼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얻어내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Football Manager 같은 게임을 예로 들어 보자. 축구 선수의 세밀한 스탯 하나하나를 수치화하여 이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제공하여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게임이다. 슈팅, 패스 등의 기술적인 수치, 점프력, 스프린트 등의 신체적인 수치 등을 넘어 리더십, 승부욕, 대담성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 심지어 히든 스탯이라고 하여 프로의식이나 큰 경기에서 잘하는 능력, 잠재능력의 한계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매년 나오는 역대 시리즈들에서 예견한 유망한 젊은 선수들이 실제로 그만큼 성장하는지 실제 세계와 대조해보면 흥미롭다. 어떤 선수는 정말로 예상대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무난하게 리그에서 적응하는 선수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저 그런 선수가 되어 잊혀지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어쩌면 그 방정식들을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해서 예상이 빗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심리가 스포츠 및 인간 평가에 있어 과학화를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평가 지표를 만든다고 할 때, 애초에 그 목적 설정 자체가 적절한지는 단순 사실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다. 여기에 더불어 평가 지표의 세부 항목들을 '선정'하는 행위에 있어 인간(들)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심지어 이에 이해관계가 개입된다면 목적이라는 대원칙 자체가 왜곡될 수 있고, 이에 따른 세부항목의 신뢰도 또한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학교를 예로 들어 보자. '훌륭한 학생'이란 무엇이며 이를 반영하는 지표는 무엇인가? 지필평가 성적? 수행평가 점수? 출석률? 지각률? 수업 중 질문 빈도? 또는 교사의 성과급을 지급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활용할 지표는 무엇일까? 수업 준비를 위한 자료 수집 주당 평균 시간? 주당 학생 및 학부모 상담 시간? 수업 중 학생들 세로토닌 분비 정도? 정부의 새로운 사업 자원을 분배받을 학교는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 학교의 3개년 국영수 학업성취도 평균? 학교 구성원(교사, 학생, 학부모)의 정책 지지 정도? 예전에 평가지표를 만들러 연구원에 간 일이 있는데 '창의성'이란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방법으로 수치화해 평가할 것인지 대단히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로 수치화가 가능한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요소들도 아직은 존재하는 것 같다.
5)
머니볼과 세이버메트릭스 전략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를 유행시킨건 빌리 빈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였지만, 정작 이를 적용하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은 돈 많은 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마치 자수성가로 중산층에 진입했지만 상속 부자를 이길 수는 없는 느낌? 어찌 보면 애슬레틱스가 적은 자원으로 일정한 성과를 거둔 부분이 장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찌 보면 더 이상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는 한계가 보여 씁쓸한 부분이다. 적당히 중산층 수준의 리그 순위는 유지할 수 있을지라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활약하는 '슈퍼스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2015-16시즌 EPL에서 레스터 시티가 우승을 차지한 일이나 양용은의 PGA 챔피언십 우승 등 스포츠에서 발생하는 '이변'이 그렇게나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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