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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가족, 인권, 스포츠의 맛살라 - 영화 《당갈(दंगल)》, 2016 본문
영화 《당갈(दंगल)》, 2016
1)
한국에는 《세 얼간이(3 Idiots)》(2009)로 유명한 아미르 칸(Aamir Khan)이 주연 및 제작을 맡은 실화 기반 영화다. 때로는 흥이 있고, 때로는 긴장감과 몰입을 이끌어내면서도, 풍족한 감동으로 이르는 영화의 전개가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 국가가 울리는데 왜 내 눈이 촉촉해지는지...
발리우드 영화에는 '맛살라(Masala)'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이는 인도 요리의 혼합 향신료를 의미하는 말에서 온 것으로, 영화 내에서 뮤지컬, 액션, 로맨스 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쓰이는 모습을 일컫는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인도 영화들 중에는 특유의 뮤지컬 안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이 특유의 댄스보다는 '가사가 있는' 노래가 주로 쓰인다. 흥미로운 것은 해당 상황마다 인물들의 대사를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보다는 노래의 가사로 인물의 심리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가사가 인물의 심리를 진솔하고도 유쾌하게 전달하는 데에 성공적이기 때문에 작품 속에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2)
이 영화는 손흥민과 그의 아버지(손웅정)가 떠오르는 영화다.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는 부상 때문에 일찍 접어야 했던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고, 둘째 아들인 손흥민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면서 결실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자기 아들을 그대로 맡기는 것보다는, 본인이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축구 기본기를 자기 아들이 완벽하게 익힐 수 있도록 충분히 공을 들였다. 손흥민이 분데스리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정도로 성장한 이후에도, 축구 내에서만이 아니라 축구 외의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까지 광범위하게 아버지이자 멘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에서 싱 포갓은 젊은 시절 실력있는 레슬링 선수였으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 탓에 레슬링 선수로서의 도전을 멈추게 된다. 이후 자식을 통해 자신의 꿈, 국제대회에서 인도에 레슬링 금메달을 안겨주는 것을 꿈으로 품고 있었고, 끊임없이 아들을 기다리나 딸만 넷을 낳게 된다. 꿈을 접던 어느날 두 딸 기타와 바비타가 다른 집 남자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을 보고 재능을 발견하게 되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딸에게 혹독한 훈련을 제공하게 된다. 레슬링을 하기 싫어했던 두 딸은 결국 국제대회에서 레슬링 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싱 포갓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다.
못 이룬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영화 내에서도 아이들은 억지로 훈련을 받게 되고, 훈련에 지친 아이들은 각종 꼼수를 통해 훈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다. 자신의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자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일 수 있고, 그러한 부모의 꿈이 자식에게 왜곡되어 자녀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제대회 메달리스트 정도의 성과는 재능, 노력, 운이 모두 필요하다. 손흥민의 아버지도 그렇고 영화에서의 아버지도 그렇고, 아버지가 이를 잘 찾아서 키워준 것이 아닌가? 그것이 생물학적인 유전의 영향이든, 가문의 습관이든, 부모가 성공의 맛을 본 영역을 자녀가 계승하는 것은 자녀 입장에서도 효율적이며 경쟁에 있어서도 유리한 선택일 수 있다. 체육인 집안에서 뛰어난 운동선수가 나오고, 음악인 집안에서 훌륭한 음악가가 길러지는 사례를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어린 자녀가 하기 싫어한다고 해서 무조건 포기하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 책임을 온전히 다 한 것인지 의문이며, 그러한 부모의 지도를 바탕으로 결과론적인 얘기나마 행복한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영화 내에서도 두 딸에게 있어 아버지가 제시해준 꿈이 진정으로 자신의 꿈이 되고,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지 않는가. 부모의 그러한 간섭을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의 맥락에서 옹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모든 교사든, 이끌어주는 이가 될 수 있고, 길을 제시해주는 이가 될 수 있고, 그저 지켜봐주는 이가 될 수 있다. 이들 중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정답은 없기 때문에, 현명하고 지혜롭게 잘 대처하자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겠다.
3)
이 영화는 여성 인권과 (특히 인도에서) 관습의 충돌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여자는 부엌에 어울리지 레슬링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들을 듣고, 레슬링 시합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되고, 온갖 방식으로 놀림거리가 되는 상황이 등장한다. 그런 놀림과 하기 싫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두 딸은 레슬링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는데, 집안의 뜻에 따라 고작 10대 중반에 시집을 가야 했던 친구가 해준 말이 그 계기가 된다. 모든 인도의 딸들이 그렇게 자라나는 것은 아니나, 21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그저 나이가 차면 시집을 보내버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정도의 역할만 주어진 존재'로서의 여성의 모습이 관습적으로 여전히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한편 이 영화는 이에 대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인공인 싱 포갓부터가 그렇다. 애초에 자신의 꿈을 이뤄줄 아들을 기다리다 딸만 넷을 낳고 꿈을 포기했던 그가 딸을 통해 꿈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 자체가 큰 인식의 전환이었다. '레슬링을 시키면 아무도 두 딸과 결혼하려 안 할 것'이라는 아내의 걱정에 '내 딸은 남편을 선택할 것'이라는 대답을 하는 싱 포갓의 대사가 백미다. 거기에 두 딸이 대회 우승으로 마을의 명예를 드높였다며 놀림에서 찬사로 태세를 전환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 또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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