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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나쁜 놈들의 모습 -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본문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1)
1980년대는 군사정권 시기 경찰력이 민주화 운동 및 반공 활동에 집중되고, 경제성장이 등이 맞물려 조직폭력배 범죄가 기승을 부리던 시점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화랑동지회 처벌,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등 역대 군사정권마다 조직폭력배를 잡아들이는 퍼포먼스가 있어 왔고, 노태우 정권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을 1990년에 하였으니 이를 '10.13 특별선언', 혹은 '범죄와의 전쟁'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조폭 소탕작전이 벌어진다.
영화는 1980년대에서부터 노태우 정권 시기 '범죄와의 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비리 공무원 출신 브로커와 주변 조직폭력배들, 그리고 여러 갈래로 얽힌 인맥들 사이의 복잡하고 비열한 생존 투쟁을 다룬 영화다. 겉에서부터 속에 이르기까지 시대상을 느끼기에 좋은데, 단순 소품이나 분장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반에 깔린 관습적인 행동들이 눈에 보인다. 가령 지금 보기에는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혈연주의나 상명하복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물론 그러한 유난스러운 인맥이라는 것도 살짝만 들춰보면 상대방으로부터 단물을 쪽쪽 뽑아내기 위한 과장된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같은 조폭 영화지만 다른 시대의 모습이 반영된 《신세계》(2013)와 비교해보는 작업 또한 흥미롭다.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개인적인 연고를 바탕으로 한 정경유착형 조직폭력배의 모습이, 《신세계》에서는 표면적으로는 기업 형태로 운영되나 그 내막은 폭력 조직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시대적인 조건과 사용되는 물질문명, 사건의 전개가 다를지라도, 조직폭력배의 본질로서의 폭력성과 이기적이고 비열한 속성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사회 제도는 왜 공정한 절차에 따라 제정되어야 하고, 어째서 합리적으로 운용되어야 하며, 어떤 이유로 공명정대한 판결에 의존해야 하는가? 정의로운 사회 제도를 위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 영화는 시대상을 통해 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제도를 만드는 공정한 틀이 없으면 불투명한 인맥과 이권에 의해 그 제도가 굴절된 채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청렴하지 못하면 합리적인 사회 협력을 위해 구성되어야 할 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 판결이 공명정대하지 못하다면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특정한 집단에 위임하여 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저 인맥에 따라 손쉽게 굴절되는 제도라면 사적인 인간관계를 초월한 대규모 집단을 통제하는 장치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아는 사람끼리 논의해야 할 일은 가족 모임이나 친목 모임 수준으로 한정하도록 하라!
2)
대단히 비열하고 이기적이면서 위선적이고 추악한 인간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쓸데없이 무겁게 흐르지 않고 재밌다! 뭔가 '찰지다'는 느낌을 주는데, 윤종빈 감독의 첫작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와 같이, 뇌리에 각인될만한 블랙코미디적 대사나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살아 있네."
최익현
"우... 그... 근데 그 실례지만... 어데... 최십니꺼?"
최형배
"경주 최갑니다."
최익현
"파는요?"
최형배
"충렬공파요."
최익현
"(무릎을 탁 치며) 내 이럴 줄 알았다. 그 행배할 때 배가, 그 배 자 돌림 아닙니까? 경주 최씨 충렬공파 39대손!"
최형배
"네."
최익현
"뭣, 자, 마! 내가 임마! 내가 니 고조 할배뻘이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 35대손! 현 자 돌림! 으?"
장 주임
"아이, 최 주임, 술 많이 취했다. 고마해라."
최익현
"아하하하! 내가 이럴 줄 알아다이까느! 으? 내가 처음 딱 봤을때에, 이 대구빡이 따 이 우리 집안 사람 같드라고. 이 골격도 그렇고. 으? 니 혹시 그 아부지 존함이 우째되노?"
최형배
"최, 무 자 일 자 되십니다."
최익현
"무 자 일.. 최무일? 최무일? 그, 혹시 그, 몇 년 전까지 참치 배 타시던 분 아니가?"
최형배
"그런데요?"
최익현
"이너마 자스기 이너므 자슥가! 내가 느그 아부지랑도 억수로 잘 안다! 마! 니 할밸 봤으면은 니 행동을 우째 해야돼노? 으? 임마 할배를 봤으면은 절부터 해야 될꺼 아이가. 으? 니 퍼뜩 큰절 한번 올려봐라. 뭘 멀뚱멀뚱 쳐다만 보노? 어? 니 퍼뜩 절 안 하나?"
(이후 박창우에게 얻어 맞는 장면)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임마! 으? 어저깨도. 으? 같이 밥 묵고! 으? 사우나도 같이 가! 으? 머 이 ***야 마, 다 했어!"
"이게 바로 10억짜리 전화번호부야, 10억짜리."
이러한 대사들은, 겉으로는 체면이나 가오 등을 챙기면서도 속으로는 썩은 인격이 보여주는 간극을 제대로 풍자하는 맛이 있다.
3)
흥미진진한 각본과 연출을 그야말로 찰지게 살려낸 최민식, 하정우, 김성균, 마동석, 조진웅, 곽도원, 김혜은 등 배우들의 역량이 돋보인다. 뭐 평가 좋은 작품들 위주로 보니 발연기를 보면서 눈이 썩을 일이 없지만서도, 이 영화의 연기들은 그야말로 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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