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다르면서도 닮은 이란에 대한 입문서 - 유달승 저, 『이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본문
유달승 저, 『이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한겨레출판, 2020
1)
이 책의 저자 유달승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 페르시아어·이란어과)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다. 그만큼 이란 땅에서, 이란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알게 된 이란의 모습이 더욱 진정성이 있게 느껴진다. 이란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입문용 교양 서적으로는 아주 적절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이라는 것은 이러한 책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다른 언어, 다른 가치, 다른 문화를 지닌 이국에 대한 풍문이나 다른 자료들을 거쳐 완성된 정보는 당연하게도 정확하기가 어렵다. 직접 그곳에서 살아보면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겪으면서 얻어낸 앎보다 정확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 중에서도 후기의 중국, 일본, 미국편보다 도이칠란트편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사실, 곧 제한된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그것도 왜곡된 경험을 하는 인간의 속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험에 기반을 둔 정보들로부터 완벽한 '정확성'을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적절하며, 그 정보가 충분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끊임없는 검토의 대상이 된다. 감각기관에 의해 수용되는 정보들이 편파적이며, 이를 해석하는 무의식적이고 지적인 과정, 그리고 이를 관념으로 형성하여 다시 떠올리는 과정 등 인간의 인식 과정에는 편파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그래도 이 책은 단편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이란 경험은 단편적이지 않고 지속적이었으며, 이를 몸으로 경험하고 마는 것을 넘어 학술적인 접근이 그 뒤에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의 이해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유용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진술, 기술의 경우 그러한 자신이 가진 입장, 이해관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원자력발전소 정책에 대한 원자핵물리학과 교수의 입장과 태양광 등 대체에너지 관련 종사자들의 입장이 다른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이란 전공 교수와 제자인 전공자들의 장래가 한국-이란의 정치, 경제적 관계와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는 말자. 물론 그 사람의 속성을 보면서 그 사람의 주장을 섣불리 재단하는 태도는 '인신공격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이란에 대한 좋은 인식을 설파하는 프로파간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2)
지중해를 둘러싼 패권전쟁인 페르시아 전쟁은 영화 《300》(2007)으로 역사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민주주의 대 전제주의'의 대결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스파르타인들과 이에 대해 복종을 요구하는 페르시아 제국.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용맹한 기상을 수호하고자 숭고한 마음으로 전장터로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페르시아는 황제의 옷차림에서부터 노예들의 행색에 이르기까지 자유와 문명의 이미지보다는 착취와 억압의 이미지에 가깝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300인의 전사들의 위대한 희생... 그 유명한 "This is Sparta!"라는 대사는 그러한 자유에 대한 수호 의지를 용맹하게 천명한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스파르타보다 페르시아가 보다 더 관용적인 국가였으며 더 문명화된 국가였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전사와 규율의 국가였지 자유의 국가는 아니었다. 민주정을 싫어하는 플라톤이 자유를 추구하는 민주정의 아테네보다 엄격한 신분과 규율의 라코니케의 정치를 보다 더 선호했음을 떠올려보자.
잭 스나이더(Zack Snyder, 1966-) 감독의 성향을 아는 사람은 그 감독이 메시지보다는 액션을 좋아한다는 점을 안다. 실제로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2013)을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각본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슬로우모션을 활용한 액션이 돋보인다. 하지만 감독 및 제작진의 의도와는 별개로, 관객들이 은연중에 스스로 심어놓는 인상이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예술작품, 특히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창작자들은 자신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띌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도구화한 자기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말이다. 노골적인 메시지들이 주는 교조적인 분위기와 이로 인한 피로감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대흉근과 복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300》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다.
3)
연꽃. 태양을 바라보며 늪에서 자생하는 연꽃을 보면서, 이란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을 추구하는 정신적 성장을 발견한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연꽃을 보며 열악한 환경이 나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76쪽)"고 한다. 지식을 쌓을수록 인간이 생물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구조와 환경에 속박된 존재라는 좌절감이 깊어가는데, 그럼에도 이러한 속박에 저항하는 가르침이 지닌 생명력은 꺼지지 않았음을 기억해야겠다.
4)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 의해 인권이란 개념이 계몽주의 등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최초의 인권선언문에 해당하는 것이 '키루스의 원통'이라는 이름으로 페르시아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이란의 인권 상황을 떠올리면 또 다른 방식으로 놀라게 된다.
5)
이란의 극진한 손님 환대 문화는 유목민적 전통과 이슬람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동시에 역사적 경험에 의해 적(최근에는 미국)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식 또한 분명하다. 가족과 손님, 그리고 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이란에게 있어 우리나라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미국과 긴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란과의 외교는 참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6)
이란인은 무슬림답게 식생활에 있어 할랄을 규범으로 지키고자 한다. 단순하게 보이는 식문화일지라도 그 기원은 복합적이다. 규범이 만들어질 당시의 위생·사회적 여건과 윤리관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결과인 것이다.
7)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슬람 혁명에 관하여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 정치 분야의 미국 독립 혁명, 명예 혁명,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 정치 혁명만 해도 볼 것이 이리 많다니! 그 외의 경제사의 혁명들, 과학사의 혁명들을 두루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지적 여정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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