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들추고 쑤셔야 하는 이혼 이야기 - 영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2019 본문
영화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2019
1)
제목은 '결혼 이야기'지만 내용은 '이혼 이야기'이다.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니콜이 찰리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아들 헨리에 대한 양육권을 두고 둘의 공방이 시작된다.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갈라서지 않고서는 서로를 가장 증오하는 사이가 되었다. 깊은 사이였던 만큼이나 이혼의 과정에서 관계가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전해진다(일-양육-이혼 소송 사이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추천).
2)
당초 변호사를 끼지 않고 갈라서고자 했으나, LA 출신인 니콜이 LA에 아들 헨리와 함께 있는 동안 변호사 노라를 고용하여 LA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 싸움이 본격화된다. 양육권의 지분을 보다 많이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얼마나 부적합한 부모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 편안함의 울타리였던 가정이 이제는 서로의 인격을 죽여야 하는 콜로세움이 됐고, 이 과정에서 변호사들은 그저 자기 의뢰인의 업무를 의욕적으로 '처리할' 뿐이다(변호사들의 '전략'에 의해 두 의뢰인은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정작 두 변호사는 법정 밖에서 서로의 든든한 친목을 재확인하는 씁쓸함이 묘사된다).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서로 덮어주었을 일들,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끄집어내어 활용하게 되는 이혼의 현실이 안타깝다.
3)
뉴욕에 비해 LA의 법원은 양육권 분쟁에 있어 어머니 쪽에 보다 우세한 판결을 많이 내리는 편이라고 한다. 노라는 이를 집요하게 노리지만, 동시에 부모에 대한 상반된 기대가 사회적 통념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이 작품에서 로라 던이 보이는 연기의 하이라이트 장면).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은 위대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진다. 양육에 있어서 아버지는 무언가 서투르고 그 실수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결국 어머니는 양육권을 얻기 쉽고 과한 기대치 혹은 비난에 직면하며, 아버지는 낮은 기대치 혹은 비난을 얻고 양육권을 얻기 어렵다(이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영화로 역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추천). 사회적 통념에는 나름의 기능이 있긴 하지만, 이것이 특수한 상황과 개별성을 부당하게 지워버리는 역할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결혼은 흔히 둘이 만나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부는 한 몸이 된 것처럼 일체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개인의 성취과 삶의 개척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자아 사이의 긴장감이 부각된다. LA에서 자신의 영화, TV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었던 니콜,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으로 천재로 인정받는 진성 뉴요커 찰리. 어쩌면 그 둘은 애초에 절충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이런 면에서는 묘하게 《라라랜드》가 떠오른다). 결국 자기 자신이 소멸하는 위기를 느끼며 절망하던 니콜이 이혼 소송을 시작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결혼제도라는 것 자체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어야 할 구시대 유물인가? 실제 이혼이 많아진 사회라 할지라도(작중 인물만이 아니라 감독, 배우 등 이혼 경험자가 많다), 내 생각에는 그런 판단은 섣부르다. 가정과 자아라는 긴장감 사이에서 더 현명한 길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다.
5)
작품 속의 배우들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니콜 역할의 스칼렛 요한슨, 찰리 역할의 아담 드라이버는 이혼의 심적 어려움과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둘 다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둘의 대사가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게 영화를 보았다. 노라 역할의 로라 던은 고객에 대해 공감해주는 듯하면서도 자기 커리어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이중적인 변호사의 면모를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법정 안에서는 경쟁하는 변호사와 극단적으로 대립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뢰인이라는 '재료'를 활용한 둘의 능력과 자존심 대결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막상 법정 밖에서는 서로 어떻게 지내냐는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