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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에 비친 홀로코스트 -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본문
아이의 눈에 비친 홀로코스트 -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Perihelion 2020. 10. 27. 08:00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Baby Driver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1)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다룬 작품들은 이미 많다. 그 중에서 이 작품은 그 잔인하고 끔찍할 수 있는 소재를 아이의 시선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가 아니면서도 홀로코스트 문제를 적절히 다룬다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청소년 및 학생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영화를 간만에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홀로코스트나 전쟁 등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다루는 영화는 그 본질상 표현이 거칠어지기가 쉬운데, 그 표현이 현실적인 것일수록 어린이 및 청소년들에게 교육용으로 활용하기가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홀로코스트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제된 표현 속에 잔혹성이 암시되어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감된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적 대우에서 드러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품는 편견과 혐오감은 어린 시청자라도 모를 수가 없다. 브루노의 새 거주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검은 연기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2)
팔을 벌리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흉내내는 브루노의 놀이 모습은 흔한 어린이의 모습이건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여건을 떠올리면 어쩐지 보기에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행기는 지형의 제약을 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하는 인간의 '자유롭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공격'하기 위해 고안된 전쟁용 항공기들은 그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자유를 파괴'하는 전쟁에 있어 침략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전쟁과 밀접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가 팔을 벌리며 따라하는 소리는 새가 "푸드득"하면서 날아가는 소리도 아니고, 고요하게 활강하는 모습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방식이 아니다. 그 소리라는 것은 "위이이잉"하면서 지나가는 전투기의 소음을 지상에서 듣게 될 때 감지하는 소리인데, 이때 동시에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겹쳐 나오는 오프닝 신의 연출이 인상적이다.
3)
같은 가족임에도 브루노와 그 누나인 그레텔의 행보가 대조적이다. 수용소의 유대인 친구 슈무엘을 알게 된 브루노는 유대인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며 친구를 그저 친구로 대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브루노에게 있어 슈무엘은 그저 새 거주지 근처에서 알게 된 새로운 친구다. 그가 유대인이라서 당하는 편견을 브루노가 가지지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슈무엘이 입은 옷을 '파자마'라고 인식하게 되며, 그 자신이 거기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갖지 않게 된다. 물론 그러한 순진무구함이 초래하는 일련의 사태가 안타까울 따름인데, 전체주의의 폭력이 자아내는 비극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표현했다.
반면 나치에 충성하는 코틀러 중위를 좋아하게 된 그레텔은 그 영향으로 나치즘을 신봉하게 된다. 코틀러 중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그가 추구하는 사상에 대한 동경으로까지 이어지고, 이윽고 그레텔은 진심으로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고 유대인을 혐오하게 되었다. 실제로 유대인에 관한 어떤 부정적인 일을 겪지 않은 청소년일지라도 그러한 사상에 경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위의 영향과 일방향적 교육의 무서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진심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본인의 충성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되는 경향이 생기게 되지만, 어린 나이일수록 그 호감의 대상을 잘 만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그 사람이 품은 '내용'이 별개라는 점은 논리적인 결론이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행동하기란 쉽지가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기가 쉬우며,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다른 특성을 내가 싫어하기가 쉽다. 그러한 인간의 특성에 의해 사람들은 자신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외양을 가꾸는 데에 공을 들이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제복을 굉장히 멋들어지게 제작한 나치의 계획을 떠올리자면, 멋짐과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가 생각과 성찰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함을 알 수 있다.
4)
브루노 눈에 비친 파자마는 실은 수용소 복장이다. 이는 그것을 입은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지워버린다.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지녔고, 취향은 무엇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격이나 능력 등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수감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몰개성화는 탄압의 주체인 나치 군인들에게서도 예외는 아니다. 제복, 군복을 입는 순간 그는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가 아닌 그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신이 입는 옷은 당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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