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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의 위대한 승리 -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본문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
1)
시드니 루멧(Sidney Lumet, 1924-2011) 감독의 1957년작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 배심원들의 토론 장면을 다룬 영화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젊은이가 사형 판결을 받을 유죄(guilty)인가 아닌가(not guilty), 곧 살인범인가 아닌가를 두고 배심원들이 판단을 내리려 한다. 배심원들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유죄 여부를 결정하려는데, 날씨도 푹푹 찌는 상황에서 다들 그냥 유죄로 빨리 끝내버리자는 와중에 어느 배심원 하나가 신중할 것을 요청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찬반을 향한 다양한 논증들이 전개되는데, 한정된 장소에서만 전개되는 고전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저작권이 풀린 이 영화는 법이나 논리 관련된 수업에서도 많이 쓰인다고 하니 고전의 불멸성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2)
푹푹 찌는 날씨, 각자의 삶이 있는 배심원들은 이 자리에 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와야 하니 온 것이다. 피고는 이민자 출신에 저학력이며 전과가 많으니 딱 봐도 의심스럽게 보인다. 증언도 있고 하니 다들 유죄로 결정해서 빨리 마무리하고 가자는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배심원들이 유죄를 결정하면 사실상 사형 판결을 받고 젊은이는 죽게 된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중요한 상황임에도,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라는 계몽주의의 선언은 배심원들이 닥친 상황 속에서 희석된다. 예전에 읽은 책의 내용 중에, 판사가 내리는 형량의 평균이 점심시간 전이냐 후냐에 따라 다르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최대로 엄정해야 할 법정이라 할지라도, 육체를 지닌 인간은 피로, 감정, 이익 등 자연적 경향성에 손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3)
이때 배심원8이 무죄 추정의 원칙을 근거로 다시 논의해야 할 것을 홀로 주장하며, 만장일치를 향한 논쟁이 시작된다. 그 또한 다른 배심원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고, 다들 빨리 끝내고 가자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에도 소신을 용기 있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의 엄밀한 추론 시작으로 하여 피고를 유죄로 보이게끔 하는 증거와 증언들이 유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과정은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감각에 의한 지식을 배제하고 확고한 진리를 찾고자 의도적인 의심을 수행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자연적 경향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하는 인간의 면모를 강조하는 칸트적 기획이 승리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처럼 보일 정도다.
4)
물론 배심원단의 추론이 모두 엄밀한 사실만 가지고 구성된 것은 아니다. 증인의 증언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인이 주목 받고 싶은 마음에 증언대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면서도 다소 그 노인의 생각을 넘겨짚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노년이 되면 정말로 주목을 받지 못함에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나의 노년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노령화 대한민국에서 이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5)
합리적 의심에 따른 토론이 보다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영화 내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이라고 언급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전후 경제성장과 민권운동이 공존하는 변화의 시기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트럼프가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말에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