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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만들어진 판결은 없다. - L. 레너드 케스터, 사이먼 정 지음,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Thirty one of the greatest trials in world history)』 본문

작품 감상/도서

그냥 만들어진 판결은 없다. - L. 레너드 케스터, 사이먼 정 지음,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Thirty one of the greatest trials in world history)』

Perihelion 2020. 3. 10. 18:27

 

L. 레너드 케스터, 사이먼 정 지음,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 현암사, 2014

L. Leonard Kaster, Simon Chung, Thirty one of the greatest trials in world history

 


 인간은 판단을 한다. 사소하게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의 컨디션에 따라 옷을 결정하는 것부터, 내 주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는 노력, 담당해야 할 일에서 순발력 있게 내려야 할 판단 등 온갖 종류의 판단을 하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이 항상 적절하게만 작동하기는 어렵고, 흔히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에 대한 판단 또한 이루어지는데 가장 공식적이고 대표적인 유형이 바로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이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판결들 중 역사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들을 31가지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제시된 판결들을 단순히 일회성 판결로 끝나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양식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단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꾸준히 재생산되고 가공된다. 이 책에서 소개한 '맨슨 패밀리 재판' 관련 일화가 최근에 개봉한 영화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2019)에 소재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판결의 유형은 크게 8가지이다. 각각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part1 제왕의 목을 자른 판결들
part2 권력투쟁과 정치공작의 무대
part3 편견과 차별이 불러온 재판과 판결들
part4 재판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
part5 광란의 사건과 판결들
part6 생각을 심판하다
part7 세계대전과 냉전을 둘러싼 재판과 판결들
part8 자본주의의 규칙을 발칵 뒤집은 판결들

 

 이와 같이 판결이라는 것은 그 사건의 종류에 따라,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 판결받는 객체에 따라, 시대 분위기 등에 따라 온갖 색깔을 갖고 자신만의 개성을 뽐낸다. 이 책이 주는 다채로운 매력은 다양한 챕터 이상으로 흥미롭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그에 따라 적합한 판결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사고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만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의 원인에서 사건, 그리고 판결과 집행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예시들을 31가지 제시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인간의 판단은 시대에 따라 굴절되고, 각자의 욕망에 따라 굴절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재판이라는 것이 단순히 특정한 사건에 있어서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서 다양한 파급 효과를 지녔다는 것이다. 'O.J.심슨 재판'은 단순 살인사건 재판인 것이 아니다. 배심원 평결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전 사건으로서 '로드니 킹 폭행 사건'과 'LA 폭동'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오히려 재판이 중계 방송된 것은 대중의 알 권리 대신 센세이셔널리즘과 관음증을 충족시켰을 뿐이며, 이득을 본 것은 광고 수익을 올린 방송사들뿐이라는 비판은 이미 심슨 재판 당시부터 있었다. 심슨 사건 관계자들은 대부분 상업적으로 큰 재미를 보았다. (...) 이렇게 보면 심슨 사건으로 손해 본 사람은 목숨을 잃고 진범도 밝혀지지 않은 니콜 브라운과 로널드 골드먼뿐인 것처럼 보인다." (228-229쪽)


 특성 사건, 특정한 정치인의 발언, 특정한 언론의 스탠스 등... 어떤 하나의 사건은 단지 그 하나의 사건으로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했던 온갖 영역에 걸쳐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측면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히 인상깊다.

 언젠가 이 책의 취지와 비슷한 책을 저술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단순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만 해도 대통령 탄핵 관련 판결이 21세기에 두 번이나 있었던 것처럼, 말 그대로 다이나믹한 코리아는 그러한 지적으로 흥미로운 소재들을 자주 제공한다. 이에 미군정시기,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시기, 조선, 고려에서 그 이전까지.. 사료들을 면밀하게 찾아보는 노력이 있고, 이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철학적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매우 재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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