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위장된 자유의 잔인함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본문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1)
다니엘 블레이크는 뉴캐슬에서 오랜 시간 목수로 살아오다 심장병에 의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질병수당을 신청하고자 한다. 하지만 상담원은 블레이크의 의사소견을 확인하는 것보다는 별 의미 없는 질문을 하여 그의 화를 돋우고, 화가 난 블레이크는 질병수당 대상자에 선정되지 못한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를 준비하면서 구직수당을 받고자 하는데, 이게 복지를 해주기 위해 만든 제도인지 복지를 안 해주기 위해 만든 제도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인터넷을 쓸 줄 모르는 블레이크에게 오로지 인터넷으로만 신청이 된다고 하고, 구직 활동을 하였음에도 제대로 증명을 하지 못해 제재 대상에 오를 위기에 처한다. 결국 가산을 팔고 빈곤하게 버티면서 항고일을 기다리는 블레이크.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고, 특별히 게으른 것도 사기꾼도 아닌데 기본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2)
불친절한 복지사, 온라인 신청을 하지 못하는 컴맹 블레이크, 지나치게 관료적인 직원들.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복지 혜택은 너무나 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블레이크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는 표층적인 원인들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그렇게 몰아세우도록 넛지(Nudge)를 넣어 설계된 제도다. 넛지는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의미의 자유주의적 개입을 말한다. 이를테면,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에서 첫달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후에는 자동결제가 되도록 설정하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후에 결제를 할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이지만, 초기 조건을 그렇게 설정하여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동결제를 이어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지제도가 정말로 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되었다면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으로 복지제도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쉽고 친절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특정한 복지제도가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그들은 복지제도를 신청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며, 복지제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유리한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를 그들의 잘못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복지제도가 오히려 정보력을 바탕으로 이를 활용할 '능력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도 참 아이러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복지제도는 거의 사기업 보험 수준이다. 약관은 길고 복잡하며, 소비자에게는 온갖 제약과 제재조건이 덕지덕지 붙고, 복지 혜택을 지급하는 책임 주체인 국가는 어떻게든 돈을 안 주는 데에 혈안인 모습이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아래 직원들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것도, 소외계층에게 똑똑해지라고 떠미는 것도 무리한 요구에 불과하다. 그저 '당신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알아서 하시고 책임은 확실하게 지십시오.'하면 다인가? 사용하지도 못할 수단을 주고 자유를 실현했노라 하지 말라!
이 영화는 선별적 복지제도 자체의 맹점을 찌르고 있다. 애초에 복지를 선별적으로 한다고 했을 때 그 '선별'을 하는 일이 문제다. 선별을 누가 할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할 것이며, 이것이 제대로 선별된 것인지 그 절차와 결과는 어떻게 확인하여 평가할 것인가? 방대한 작업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그렇다고 모든 복지 영역에서 보편적 복지만이 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선별적 복지를 실행할 때에 제도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매우 주의하여야 함은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제도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제도의 대상이 아니라서 절박하지 않겠지만.
3)
이 영화는 잔인한 영화가 아니다. 피가 솓구치는 것도 아니고, 신체 일부가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괴물이나 좀비 등이 등장하지도 않고, 음악적 효과가 극적이지도 않다. 무언가에 찔리거나 절단되거나 살인을 하거나 누군가를 학대하는 것도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2007)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를 떠올려보자. 사람을 거리낌 없이 죽이면서 죄책감이라는 것이 없다. 《악마를 보았다》(2010)의 장경철,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등... 잔인하고 끔찍한 캐릭터나 연출, 상황을 제시하는 영화는 많다.
그런나 그런 영화들보다도 이 영화는 더 잔인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안톤 쉬거나 장경철을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제도는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먹을 거리를 위해, 자녀가 학교에서 놀림받는 일을 막기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너무 쉽게 얻는 나머지 얻은 것인지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기나긴 인내와 고통 없이는 쟁취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I am not a client, a customer, nor a service user.
I am not a shirker, a scrounger, a beggar, nor a thief.
I'm not a National Insurance Number or blip on a screen.
I paid my dues, never a penny short, and proud to do so.
I don't tug the forelock, but look my neighbour in the eye and help him if I can.
I don't accept or seek charity.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 작중 다니엘 블레이크가 작성한, 그의 마지막 연설문
영화에 등장하는 다니엘 블레이크 본인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대단히 친절하다. 아니,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친절한 이웃들이다. 어쩌면 그런 이웃들이 없이는 이 잔인한 영화가 너무 심각하게 잔인하기만 해서 사람들이 눈 뜨고 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혹은 그러한 서로를 챙기는 이웃의 정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제도가 그들을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감동적인 이웃의 정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불합리한 제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4)
이 영화를 통해 잔인하지 않은 잔인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켄 로치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을 느낄 수 있으며, 그가 왜 칸 영화제 단골인지를 알 수 있다. 어떤 감독은 미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에 탁월하고, 어떤 감독은 시원한 쾌락을 선사하는 데에 탁월하다. 켄 로치는 메시지를 담백하고 확고하게 전달하지만, 그렇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그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건져내게 하는 데에 탁월하다.
'작품 감상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어깨 위에 올라올 고양이는 어디에? -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A street cat named Bob)》, 2016 (0) | 2020.03.30 |
---|---|
개인정보의 바다에서 딸 찾기 - 영화 《서치(Searching)》, 2018 (0) | 2020.03.30 |
트라우마가 게릴라전을 펼치지 못하게 하라! -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 (0) | 2020.03.25 |
작은 장미여도 가시는 있다. - 영화 《라 비 앙 로즈(La môme)》, 2007 (0) | 2020.03.23 |
그들이 'The Post'인 이유 -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2017 (0) | 2020.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