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트라우마가 게릴라전을 펼치지 못하게 하라! -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 본문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
1)
어느날 지각을 해서 헐레벌떡 학교에 가는 꿈을 꾸고,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고 안도하여 다시 편안한 잠을 자다가 지각을 해버리는 꿈을 꾸고, 다시 그것이 꿈이어서 불안한 마음에 시계를 보니 위험한 시간이었음을 자각하는 식의 꿈을 꾼 적이 있다.
또 어느 날에는 내가 군대 신병으로 자대에 배치를 받은 것이다. 신병이 왔다고 일종의 환영회 비슷한 것을 하는데,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져 "이미 한번 해봤으니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분명 한번 갔다 온 건데 내가 여기 왜 또 있는 거지?'하면서 꿈에서 깼다.
《인셉션》은 바로 이 꿈, 무의식의 바다의 심해까지 들여다본다는 흥미로운 소재를 활용한 영화다. 명작 SF답게 '인식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주어지 경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내면의 고통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다. 또한 그 고민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던지는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에서 명작이라 할 수 있겠다.
꿈이라는 소재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더욱이 그 상상력을 구현하기 아주 좋은 재료다. 다만 실사 영화에서 이를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는 것에는 연출에 있어 상당한 능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장면 전환이라는 점에서 여러 단계의 꿈과 현실을 엮는다는 것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요소임에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은 자기 특유의 방식으로 이를 짜임새 있게 엮어냈다.
2)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사람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들 중 어떤 것들은 마음의 상처로 다가와 무의식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자리잡은 상처는 특정한 순간이 되면 '방어기제'라는 이름으로 고개를 내밀어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영화에서는 겉으로는 무난하게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의 바다인 꿈, 그리고 꿈의 꿈을 파서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그 내면에 무언가 상처 혹은 마음에 걸리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작품 내에서는 로버트 피셔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그의 상처를 교묘하게 인도하여 목적(특정한 마음을 형성하는 Inception 행위)을 달성하려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인셉션 작전의 리더 격인 도미닉 코브야말로 그러한 상처를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결과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그의 내면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정신분석 치료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 겪고 싶은 것만을 겪는다면야 좋겠지만, 현실은 고통과 고뇌와 절망을 제외하고는 깊이있게 논하기 어렵다. 때로는 기억을 편리하게 지울 수 있는 장치가 있어서, 괴로움의 재료가 되는 특정한 기억만 안전하게 지우고 싶은 욕망이 들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이미 겪은 경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마음의 편안함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싫은 것들을 그런 식으로만 대한다면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회피일 뿐이다. 괴로움에 심각하게 빠진 사람이 일종의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방편으로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면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진실을 외면한 채로 평생을 살아가도록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을 건강한 해결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결국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객관화하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근본적인 대책이다. 정신승리에는 한계가 있으며, 비정한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괴로움과 고통에 직면해서, 그 고통의 기억, 트라우마가 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으로 우리를 마리오네트처럼 휘두르게 내버려두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윽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프로이트의 유산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트라우마가 게릴라전을 펼치지 못하게 하라!
3)
영화 음악은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맡았는데, 신기하게도 이 작곡가의 다른 영화음악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The Dark Night)》(2008), 《노예 12년(12 Years a Slave)》(2013), 《인터스텔라(Interstellar)》(2014)에 사용된 음악들이 상황에 적절하게 들리는 기분이다.
4)
《라 비 앙 로즈》의 마리옹 코티야르와 "Non, je ne regrete rien."가 또 나와서 반갑다.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의 내용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암시하는 듯하여 아주 흥미롭다.
그 외에도 놀란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도 출연하는 배우들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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