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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내 존엄을 보장해주지 않아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 본문

작품 감상/영화

투표가 내 존엄을 보장해주지 않아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

Perihelion 2020. 4. 8. 16:39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

Two Days, One Night

 

 

 

1)

 산드라는 우울증 치료 후 복직을 하려 한다. 그런데 직장 동료들이 그녀가 복직하는 대신 보너스를 받기로 투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제보로 인해 이전 투표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고,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결정된다. 산드라는 월요일 아침 전까지 주말 동안 16명의 동료들을 직접 찾아가 어려운 설득을 하려 한다. 

 

 

 

 

2)

 동료들을 설득하러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비참함의 연속이다. 이미 대부분은 나 대신 보너스를 택했는데 이들 얼굴을 보고 내 사정을 설명해서 설득을 해야 한다니. 그렇다고 동료들을 마냥 원망할 수는 없다. 막상 찾아가서 산드라가 호소하고 보니, 다소 비인간적인 투표를 해야 할 정도로 이들의 상황 또한 척박한 토대 위에 있던 것이다. 친한 줄 알았는데 어떤 동료는 만나주지도 않는다. 설득을 하고 있는데 듣던 부자(父子)간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그저 나는 내 생계를 위해서 원래 하려던 일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그런 당연한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오고 '남들의 보너스 노리는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산드라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어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에게 이런 시련이. 그러나 정 떨어질만한 회사라 해도 해고되지 않기 위해 분투해야 할만큼 생계가 만만하지도 않아서 더 답답하다. 남편인 마누는 산드라를 끊임없이 위로하고 챙겨주지만, 산드라가 직장을 쉽게 포기하게끔 할 여유는 없어 안타깝다.

 

 이런 상처나 주는 직장 때려치우고 다른 곳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것이 말로는 참 쉽다. 하지만 작품에서와 같이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이에 따라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직장을 떠난다는 것을 가볍에 말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노동자 입장에서 대체할만한 직장 선택지가 많다면 애초에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겠는가... 감원이냐 보너스 삭감이냐를 둔 투표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특정한 분야에서 특정한 전문성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 시대적인 변화, 경제 지형의 변화 등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직장을 잃게 된다면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이 보다 저숙련 노동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해온 역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주 오래 전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빠르고, 앞으로도 빠를 것이라 여겨지기에 노동에 있어서 인간이 대체되는 일이 앞으로도 광범위하고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이런 때에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살아남는 사람들은 그 전문성이 위대해서 그런 것일까? 자신의 전문성을 잃고 저숙련 노동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선견지명이 없었던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인공지능의 시대가 눈에 보임에 따라 기본소득 이야기가 나오고는 있지만 이것이 노동을 통해 자존감을 확보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잠재워줄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란 단순히 직업을 하나 잃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을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장이 사태의 흑막이었나?
착한 척은 다 하는 사장

 

 

3)

 막판에 사장의 달콤한 제안, 이럴 거라면 투표는 왜 했나 싶을 정도의 제안이 들어온다. 애초에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동료들이 위인적 자비심을 갖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적 비정함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기에 더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산드라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존엄(dignity)을 당당하게 유지한다.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느낀 패배감과 흘린 눈물과는 대비되게, 자신의 존엄을 확인한 산드라의 표정에서는 우울감을 찾을 수 없다.

 

 어찌됐든 처음의 2:14에 비해서 월요일 투표에서 얻어낸 결과는 괄목할만하다. 주말 동안에 동료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얼굴에서 드러나는 각자 삶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고, 고통에 공감하게 되는 과정은 산드라와 동료들에게 동시에 일어난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자, 직장인은 단순히 숫자로 표현되는 법인의 성과를 위해 돌아가는 기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산드라는 동료가 그저 비정한 기계가 아님을 확인하였고, 마지막에는 본인이 인간임을, 존엄성을 갖춘 존재임을 확인한다. 역설적이게도, 산드라는 그러한 존엄을 비참함을 경험하던 그 과정에서 동료들을 '대면'하면서 획득해낸 것이다.

 

 

 

4)

 우울과 불안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그러한 심리를 겪어본 사람만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대한 작품, 위대한 연기를 통해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감독인 다르덴 형제(장 삐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와 주연 마리옹 꼬띠야르의 역할을 이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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