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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 속에서 빛나는 고결한 영혼 -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본문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1)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동명의 소설(1862)을 원작으로 하는 유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것이다.
거의 모든 대사가 노래로 되어 있는데, 이를 성-스루(sung-though)라 부르며, 풍부한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덕분에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 내내 훌륭한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자베르Javert 역의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 부분은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서도). 이에 노래 녹음과 영상 연기를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진행하는 촬영기법상 마이크 등을 숨기기 위해 클로즈업이 많은데, 이에 따라 연기자들의 감정 전달을 밀착해서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쩌면 잦은 클로즈업으로 인해 감정의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배경 음악 없이 특유의 감정을 전달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2007)나 《허트 로커(The Hurt Locker)》(2008)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작은 화면으로 본 영화의 감동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뮤지컬 공연을 직접 보러 갈 때의 감동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영상으로 본 한국어 버전 "One Day More",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그렇게 감동적인데 이게 현장에서 듣는 거라면...!
2)
"Les Misérables"은 '불쌍한 사람들' 정도의 뜻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불쌍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빈곤, 억울함, 질병, 사생아, 낙인, 도망, 반역자, 죽음, 자살, 비뚤어진 심성, 좌절된 사랑, 가족과의 연을 끊은 삶 등. 그 와중에 돋보이는 것은 꾀꾀죄한 행색(특히 하수도에서)에 대비되게 빛나는 장 발장의 고결한 영혼이다. 물건을 훔쳐 도망갔던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건네는 미리엘 주교의 자비를 계기로 변화한 그의 모습은 법과 제도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의 모습 그 자체다. 은혜를 입은 고결한 영혼은 그 자체로만 빛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을 비추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결한 영혼의 빛에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자베르의 마지막 선택이 안타까울 뿐이다.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희망과 구원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고결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 테나르디에 부부의 모습은 흥미롭다. 맡은 아이(코제트)를 함부로 대하고, 손님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등쳐먹으며 살 생각으로 가득한 이들은 일종의 악역으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지만, 특유의 해학성과 이를 표현해내는 연기자의 역량과 호흡(사샤 바론 코헨Sacha Noam Baron Cohen과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에 의해 비참하고 무겁기만 한 영화에 있어서 양념 역할을 해낸다. 타인을 등쳐먹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나, 혁명 이후 파탄이 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와중에 그러한 성품을 생존 전략으로써 습득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그들 또한 "Les Misérables"에 포함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1789)을 기억하지만, 혁명 이후 혼란에 관심을 가진 이는 많지 않다. 비참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혁명으로 구체제(앙시엥 레짐, Ancien Régime)를 무너뜨렸지만 그 결과는 과연 혁명을 일으킨 자들이 바랐던 이상에 근접했는가? 오히려 민중의 삶에서 빈곤과 질병, 비참함은 여전했다. 프랑스는 온 유럽을 대상으로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의 공포정치, 테르미도르의 반동 (Thermidorian R eaction), 나폴레옹(Napoleon I)의 황제 집권, 부르봉 왕가의 복구,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한 오를레앙 왕조... 피지배자 입장에서는 지배자가 다른 지배자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1832년 왕정의 폐지를 위해서 공화주의자들이 6월 봉기를 일으켰고, 이 작품은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 소설과 영화에서와 같이, 6월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피로 점철된 역사의 한 장을 추가했을 뿐이다.
역사에 있어 혁명론자(revolutionist)와 점진론자(moderatist)의 대립 사이에서 선택의 기준을 세우긴 어렵다. 보수주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자신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을 통해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 혁명이 끼친 변화의 물결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프랑스 인권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1789)은 현대적인 공화국들의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였고, 이를 통해 구현되고 보호되는 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점진론자든 혁명론자든, 개개인과 사회, 나아가서 역사는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Les Misérables"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로만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점진론자는 누군가의 고통을 타성에 젖어 바라보기만 할 뿐이고, 앞길만 보는 유토피아적 혁명론자는 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한다. 결국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활동의 성패를 평가할 때, 그 역사적인 눈의 초점을 "Les Misérables"에게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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