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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선생님 - 영화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Ucitelka)》, 2016 본문
영화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Ucitelka)》, 2016
영어 제목 The Teacher
1)
1983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 마리아 드라즈데초바는 담임으로 등장하는 첫날부터 학생들을 한명씩 세워놓고 각자 부모의 직업이나 배경 등을 말하게 한다. 이후 학교 공산당 대표당원이라는 권위, 소련에 살고 있다는 인맥, 성적을 매길 수 있는 권한 등을 악용하여 학생 및 학부모들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이나 청소 등 온갖 사적인 착취를 감행한다. 참다못한 학부모와 교장이 뜻을 모아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학부모 회의를 소집하지만, 학부모들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2)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68년 '프라하의 봄([체]Pražské jaro, [슬]Pražská Jar, [영]Prague Spring)'이라는 사건을 겪는다. 공화국의 자유를 위한 움직임은 소련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많은 이들이 좌절을 겪고, 공화국을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83년은 이러한 사건 이후 사회주의적 통제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기이며, 작중 리트만의 아내가 해외에서 살게 된 이유를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는 베트남 전쟁 와중이었으며, 68혁명이 일어났고, 마틴 루터 킹을 필두로 한 인권운동이 전개되었다.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후에 많은 영감과 영향을 전한 사건이었으나, 그 직후 보수화가 반동으로 따라나오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경직화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었고, 이 영화는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3)
별 이상한 선생도 다 있다 싶겠지만, 이 영화가 어느 한 교사(The Teacher)의 일탈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역사적인 사건이 그 이후 시대상을 구성하였고,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을 감독이 작품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영하여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이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1945)을 떠올려보자. 권력의 사유화가 초래하는 일방적인 횡포는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이는 이문열이 제시한 시대에서나, 조지 오웰이 풍자하고자 하는 사회에서나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습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어떤 존재가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주변을 노예화해버린다. 이에 노예화를 거부하여 저항하고자 하는 모임(학부모 회의)이 개최되나, 노예가 된 사람들의 모임은 그 뜻을 쉽게 규합하지 못한다. 그 권력은 일방적으로 착취만을 행한 것이 아니라, 순응적인 노예에게는 후한 보상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달콤함을 누리는 입장에서는 굳이 그러한 상태를 바꾸고자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자유에 익숙함을 느끼고, 억압에 불편함을 강하게 느낀다면 이러한 상태를 용납할 수 없겠지만, 프라하의 봄 이후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자유보다는 억압이 익숙하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보다 노예로서 편익을 누리기가 더 익숙한 상태가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문제가 해결된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다. 문제가 발생한 구조적인 원인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억압적인 선생님, 제2, 제3의 마리아 드라즈데초바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작품의 초반과 대응되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음악과 대비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4)
오늘날 우리들의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영화에서는 일어나는데, 이를 통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는 공인된 제도가 권력의 타락을 방지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야말로 좋은 제도가 권력의 폭주를 예방하는 방지턱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 학기를 앞두고 제출해야 하는 교육과정, 평가 등 온갖 계획서, 그리고 각종 정보들을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 등이 그러하다. 법률과 규정이라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우며 귀찮고 성가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역사적으로 체험을 해왔다. 개인적인 선호나 자의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은 끝내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게 된다.
5)
작중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과정에서 마리아 드라즈데초바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깎아내리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지능이 낮다느니, 폭력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느니 하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영화 마지막에는 이런 대우를 받은 아이들의 후일담이 전해지는데, 마리아의 악담과는 전혀 다를 인생을 사는 것으로 언급된다. 사람의 미래와 가능성을 함부로 재단하여 한계선을 긋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알게 한다. 그러면서도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나 낙인 효과(Stigma Effect)를 떠올리면, 그런 억압과 폭력이 계속 이어졌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섬뜩한 기분도 든다.
6)
마리아 드라즈데초바를 연기한 슬로바키아 배우 주자나 마우레리(Zuzana Mauréry, 1968-)의 연기가 인상이 깊은데, 마치 영국의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 1966-)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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