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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의 디딤돌이 아냐 - 영화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The High Note)》, 2020 본문
영화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The High Note)》, 2020
1)
그래미 상을 수차례 수상한 흑인 여성 R&B 슈퍼스타 그레이스 데이비스는 새로운 정규 앨범을 출시하는 것보단 공연과 라이브 앨범에 전념하면서 중년의 삶을 보내고 있다. 대단히 훌륭한 음악적 경력을 쌓았고 대체로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장기간 정규앨범을 출시하지 않아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발전이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레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하는 개인 비서 매기 셔우드는 그레이스의 오랜 팬이어서 비서 생활을 비교적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음악 프로듀서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틈을 내어 노력하는 중이다.
2)
그레이스 데이비스는 장기간 새 정규앨범을 출시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간직한 음악적 열정마저 없애버리진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춰 온 매니저 잭은 그레이스가 새 정규 앨범을 출시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보단 공연과 라이브 앨범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를 원한다. 그레이스는 음악적인 도전을 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있으면서도, 모험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안정적인 선택을 외면하지 못한다.
꿈을 추구하는 것과 안정적인 생활이 갈등할 때, 일의 성취와 사랑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의 위험이 있고, 결국은 '만족하기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결정에 따른 슬픔을 보여주려 하면서도, 그럼에도 추구하는 것들이 어느 시점에서 다 만나게 되는 낙관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밀한 개연성을 강조하는 영화는 아니나, 메시지를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전달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3)
Grace Davis
I am not your stepping-stone.
난 너의 디딤돌이 아냐.
David Cliff
I’m not your escape plan, Maggie.
난 너의 탈출경로가 아냐, 매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보이는 양상은 다양하다. 누군가를 대할 때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일적인 성취를 얻고자 할 때가 있고, 어떤 상대방에게는 사랑이나 우정, 안정감 등 정서적인 것들을 얻고자 한다. 그렇게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할 때 당초 의도했던 대로 관계가 발전하기도 하고,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가 전개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생각하는 관계의 본질이 각각 다를 때 상처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매기는 그레이스의 진실된 팬이면서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레이스의 노래를 프로듀싱하는 꿈을 그린다. 또 데이비드를 자신의 클라이언트로 삼아 프로듀서로서 성공하고 싶어하면서도 그에게 다른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일로 만나는 사람과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구분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형성한 관계가 여러 방식으로 중첩이 될 때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지?'
내가 누군가에게 사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상대방은 나를 업무적인 관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 상대방의 사적인 호의가 어쩌면 그 사람의 성공의 위한 수단인 것처럼 느껴질 때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칸트 철학이 어려운 문체로 쓰였긴 하나, 그 '인간성의 정식The Formula of Humanity' 속에 담긴 관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직관적인 감정으로 심어져 있다.
"너의 인격에 있어서든 다른 사람의 있어서든 언제나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1785, G 4:429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auch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e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G 4:429
"Act so that you use humanity, as much in your own person as in the person of every other, always at the same time as end and never merely as means."
—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1785, G 4:429
3)
음악 영화의 색깔과 매력은 그 영화에서 활용하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1965), 《아마데우스(Amadeus)》(1984),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2012), 《위플래쉬(Whiplash)》(2014), 《라라랜드(La La Land)》(2016),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2018) 등 다양한 음악 영화가 있지만, 미국의 흑인 R&B 음악이 주는 감성만큼은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미국의 음악 산업의 면모를 다루는 점이 흥미롭다.
4)
두 주연 트레이시 엘리스 로스(Tracee Ellis Ross, 1972-)와 다코타 존슨(Dakota Johnson, 1989-)이 상당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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