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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기로는 베테랑이지 - 영화 《베테랑》, 2015 본문
영화 《베테랑》, 2015
1)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작품으로, 여러모로 감독의 2010년 작품 《부당거래》가 떠오른다. 범죄를 추적하는 경찰(황정민)이 등장하며 두 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이 있고, 도덕적 타락을 다루며 사회 고발과 풍자성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두 영화가 같다. 코미디와 통쾌함이 더 강하지만, 결말이 덜 비정하고 류승범이 안 나온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2)
이 영화는 여러 의미에서 '어이가 없음'의 영화다.
배철웅
좀 되는데요, 사백이십...
조태오
사, 사백이십억?
배철웅
아니요.
조태오
사백이십만?? 아나, 하.
기사님, 맷돌 손잡이 알아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 그래요, 어이. 맷돌에 뭘 갈려고 집어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 그래요. 황당하잖아. 아무 것도 아닌 손잡이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니까.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사실 조태오가 말한 '어이'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국립국어원에서도 이 표현의 정확한 기원을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요한 것은 '어이'라는 말의 진짜 어원이 아니다. 조태오는 어이의 어원을 부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을 한다. 그의 그러한 비뚤어진 사고방식이야말로 어이가 없다.
또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이 없으며 비상적으로 해결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는 '특권층의 타락'에 어이가 없다. 지인들과 술자리를 벌이다가 재벌답게 노는 것이 뭘까하면서 양옆에 앉은 여자들에게 기행을 벌인다. 격투기 스파링을 하면서 상대방이 더 잘하자 비열하게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그저 분풀이를 했다는 정도로 여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조태오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조각조각들이 각각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이다. 제왕적인 오너의 기업 '통치', 오너 일가의 기업 사유화와 그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부작용들이 흔히 지적되는 관행들이다. 사건사고로는 재벌 2세 야구방망이 구타 사건, 마약, 성착취, 보복폭행, 살인교사 의혹 등등... 역시 각본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어이가 없다.
3)
서도철
내가 죄짓고 살지 말라 그랬지.
배철웅
나야 괜찮은데, 차 다칠까봐.
서도철
요샌 어딜 가나 사람 다치는 건 신경도 안 쓰는구만?
이 영화는 단순히 조태오라는 기형적인 캐릭터를 걸고 넘어지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태오를 구성하는 조각조각들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단순하게 모으기만 한다면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현실적인, 때론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인간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들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그 현실은 감독의 스타일에 맞는 대사로, 황정민 등 배우의 연기력을 거쳐 적절한 장면으로 탄생했다. '자신의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을 구현한 대사 "내가 죄 짓고 살지 말라 그랬지", 사람보다 물건을 더욱 중히 여기는 인간소외를 꼬집는 "요샌 어딜 가나 사람 다치는 건 신경도 안 쓰는구만?" 등이 그렇다.
영화에서는 그러한 대사들에서 비추고자 하는 '희망'들을 부분적으로 성취해내는 통쾌함이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이 영화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관객들은, 아니 적어도 감독의 《부당거래》(2010)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의 결말에 기묘하게 만족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마땅히 그러하지 못한 현실에 너무 길들여져버린 내 눈이 왜곡되고야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3)
많은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즐겁지만, 역시 조태오라는 괴물을 연기한 유아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을 먼저 본 다음에 이것을 보니, 유아인이라는 이 배우는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계층의 극에서부터 극까지 연기해낼 수 있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연기 활동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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