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는 풋내기다. - 레이먼드 카버, 『풋내기들(Beginners)』 본문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우열 옮김, 『풋내기들』, 문학동네, 2015
Raymond Carver, 『Beginners』, 1980->2008
1)
https://scientia-libera.tistory.com/42
레이먼드 카버는 영화 《버드맨》을 통해 알게 된 작가다. 그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의 문구들, 그리고 작중 작품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When We Talk About Love)』(1981)이 이 작가에 대한 나의 흥미를 자극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찾는 과정에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편집자 고든 리시(Gordon Lish, 1934-)가 레이먼드 카버의 원래 결과물인 『풋내기들(Beginners)』(1980)의 상당 부분을,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들어내어 출판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원래 작품인 『풋내기들』을 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겼다. 고든 리시가 편집한 분량은 상당히 많은데, 두 책을 비교해보면 두께만으로도 그 편집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단편들을 살펴보면 같은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인상과 해석을 하게 된다. 사실상 레이먼드 카버와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이란성 쌍둥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작가의 입장에서 자기 작품의 많은 부분이 잘려서 출판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동시에 잘려나간 책으로 인해 더 큰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그 아이러니한 기분은 겪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흔히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여겨진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말 그대로 최소한을 추구하는 생각이다. 옷을 입는 데에 있어서 미니멀리즘이라면 장식과 화려함을 배제하고 기능적인 면에서 최소함을 추구하는 정도로 옷을 입고, 집안 인테리어에 있어서의 미니멀리즘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이나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서도 미니멀리스트들이 있는데, 문학에 있어서 미니멀리즘이란 문장을 최소화하여 작품에 있어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을 독자가 적극적으로 '읽어내게끔' 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글에도 그러한 특징, 절제된 문장과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이 생략들로 인해 "뭐지 갑자기 끝인가?",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읽는 와중에 이야기를 대하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메시지나 교훈을 전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다른 흔한 작품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톨스토이 같은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미니멀리즘 문장의 맛을 알게 되면 그 특이한 향기에 매료될 것이다. 물론 그 맛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라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글은 보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뉠 수 있어 보인다. 『풋내기들』에 비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미니멀리즘 정도가 더 강하기 때문에, 두 책 중에서 고른다면 초심자에게는 『풋내기들』을 보다 더 추천한다.
2)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상태가 이상하거나 하는 짓이 이상하다.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비현실적이지는 않은 인간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합리적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실제 사람들은 제3자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아주 흔하게 저지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나도 어딘가 이상하겠지 싶다.
3)
인물들만이 아니라 인물들이 처한 상황도 아름답지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온하게 늙어가겠지' 하는 식으로, 누구나 그럴싸한 전망을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도 없고 내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든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져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도 난 계속 빙빙 돌아서 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4)
결국 이러한 모든 모습들은 이 책의 제목으로 수렴된다. 누구나 인생의 풋내기, 초보자(Beginner)다. 훈수 두는 입장에서야 뻔하게 보이는 것도 초보자에게는 어렵다. 풋내기들(Beginners)이 모인 곳이 내가 사는 곳이라는 것을 체감하면 할수록 보다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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