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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변론 - C.S.루이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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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변론 - C.S.루이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Perihelion 2020. 6. 16. 16:39

 

C.S.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5

Clive Staples Lewis, 『Mere Christianity』, 1952

 

 

https://en.wikipedia.org/wiki/C._S._Lewis

 

1)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Belfast) 출생의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영문학자이자 비평가,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1950~1956) 등을 쓴 문학 작가,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나니아 연대기』는 아동 대상 판타지 문학으로서, 기독교적인 생각을 판타지의 세계관으로 녹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성공회교도이지만 그의 저술은 다양한 분파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편이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C-S-Lewis

2)

 기독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라고 알고 있는 그것은 그 이름 하나로 불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분파들을 포함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회 등 큰 분류 내에도 수많은 분파가 있다. 이에 루이스는 '기독교'라고 불리기 위해 필요한 '최대공약수'를 그의 글로 규명하고자 했다. 

 

기독교 세계 내부에 아무리 극심한 분열이 있다 해도, 이 최대공약수와 비기독교적인 신념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입니다.(14쪽, 머리말)

 

 기독교를 표방하는 입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입장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혹은 기독교와 불교, 더 나아가서는 무신론과의 차이보다는 미미한 수준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https://www.sandiegouniontribune.com/entertainment/books/story/2020-03-30/callahan-author-q-and-a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동맹자가 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63쪽, 1부 5장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실재는 복잡할 뿐 아니라 대개는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실재는 말끔하거나 분명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와 아주 다릅니다. …
 사실 실재란 대개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78-79쪽, 2부 2장 "하나님의 침공")

 

3)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오해, 기독교적 삶에 대한 오해를 보다 엄밀한 논증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낙관적인 일만을 기대하는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 선악에 대해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원론(Dualism)'을 언급하며,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변증을 사용하려는 그의 진지한 시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문학가답게 비유를 자주 사용하여 이해를 도우려는 습관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좌파 진영의 독자들은 이 내용이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하다며 몹시 화를 낼 것이고, 반대편 진영의 독자들은 외려 너무 그 쪽으로 치우쳤다며 화를 낼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 그리기를 방해하는 진짜 암초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정말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입장을 지지해 줄 내용을 기독교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일 뿐입니다. (144쪽, 3부 3장 "사회도덕")

 

 

 

 순결은 기독교 덕문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입니다. 여기에는 피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규범은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충실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완전히 금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우리의 본능에도 어긋나는 규범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틀렸든지 우리의 성적 본능에 그야말로 문제가 생겼든지 둘 중 하나가 분명합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우리의 본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쪽에 동의합니다. (157쪽, 3부 5장 "성도덕")
 사람들은 성을 쉬쉬해야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사람들은 성에 대해 쉬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쉬임없이 떠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은 여전히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쉬쉬해 온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즉, 성에 대해 쉬쉬했기 때문에 성이 골칫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60쪽, 3부 5장 "성도덕")

 


4)

 기독교적 최대공약수를 설정하려는 그의 의도와 달리, 그가 언급하는 기독교적 도덕이나 결혼관에 대한 논의에 그가 살아온 시대적(20세기 전반), 문화적(영국 옥스브리지), 사상적 특수성(성공회, 근대적 보편주의)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편적 도덕에 대한 신뢰 및 자연과학과 신앙의 영역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칸트의 흔적이, 기독교인의 덕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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