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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으로 바라보는 인간 - 어윈 W. 셔먼,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Twelve Diseases That Changed Our World)』 본문
질병으로 바라보는 인간 - 어윈 W. 셔먼,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Twelve Diseases That Changed Our World)』
Perihelion 2020. 7. 3. 20:51
어윈 W. 셔먼 지음, 장철훈 옮김, 『세상을 바꾼 12가지 질병』, PNU Press, 2019
Irwin W. Sherman, 『Twelve Diseases That Changed Our World』, 2007
1)
특정한 소재를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다. 최근에 그러한 책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 아주 반갑고, 다음에 접할 그러한 책이 또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질병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책이다. 포르피린증, 혈우병, 감자마름병, 콜레라, 천연두, 흑사병, 매독, 결핵, 말라리아, 황열병, 인플루엔자, 에이즈 등 다양한 질병들에 대응하는 인간의 여러 모습들, 그리고 특정 질병이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최근의 전염병 시국과 무관하지 않다. COVID-19이 장기간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전염병에 관련된 책을 알아보던 중 알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정은경 본부장의 추천사가 적혀 있다. 이 책이 최초 출간된 시점이 2007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시점이 COVID-19이 유행하기 전인 2019년 7월이라는 점이 묘하게 느껴진다. 과거에 있었던 전염병들로부터 앞으로의 전염병 사태의 모습에 대한 예언을 듣는 기분마저 든다.
2)
이 책은 목적에 부합하게 큰 파급력을 선사했던 질병,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는 전염병 위주로 다루고 있다. 각 챕터의 앞부분에는 질병이 어떤 식으로 사람에게 찾아오고,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일으키는지에 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그저 비슷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전염병의 원인이 기생충, 세균(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각각에 적용되는 예방 및 치료 방법이 상이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인류는 오랜 시간 이러한 질병들에 당해오다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제서야 기생충의 박멸, 항생제의 사용을 통한 박테리아 제거, 백신을 통한 바이러스 질환 예방과 항바이러스제 사용을 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COVID-19를 비롯하여 HIV, 에볼라, 말라리아, 결핵 등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전염병의 병원체들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실정을 보고 있노라면 관련 분야의 과학이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음을 체감하게 된다. 과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최근 COVID-19의 변이를 넘어설 수 있는 날이 언제 오게 될까?
학술 서적이 아님에도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여지가 없지는 않은데, '비말(飛沫)'과 같은 단어들은 2019년 출판된 책임을 감안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는 하다. 또한 이 책의 목적이 질병의 기전을 생화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러 아주 상세히 다루어야 하는 데에 있지는 않지만, 관련된 설명 또한 있기 때문에 질병의 기전에 대해 설명을 하는 부분에 있어 적합한 그림 자료가 있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COVID-19의 무증상 전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언론 등에서 활용한 이미지 자료들이 도움이 되었듯이 말이다.
물론 사진과 같은 자료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지 않은 점이 한편으로는 증상 사진이 없어서 덜 고통스럽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계속되는 구토와 피를 토하는 모습, 검게 변해가면서 죽어가는 흑사병의 증상, 그야말로 말라서 죽어가는 콜레라 환자의 모습 등은 글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실제로 적나라한 사진들이 있었다면 물론 그것 또한 교육 자료로서의 가치는 있겠지만, 교양 독서를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단순 경각심 고양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독서였을지도 모른다.
3)
질병은 그저 사람이나 동물, 식물이 아프고 죽는 것에서 끝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저 'xxx명이 죽었다' 식의 요약된 숫자로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유조차도 몸을 가지고 활동하는 가운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질병과 죽음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정체성에 가하는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몸의 어떤 부위든 아픔으로 인해 삶에 제약을 느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심혈관계 문제를 겪은 사람이 음식물들을 보는 시선이 다르고, 무릎에 문제를 겪은 사람이 계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간디스토마로 고생했던 사람이 바라보는 민물고기가 다르고, 흑사병을 겪은 사람이 바라보는 쥐가 다르다.
4)
잉글랜드 왕가를 괴롭힌 포르피린증,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의 여러 왕가에 영향을 끼친 혈우병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전제군주 국가 체제의 불안정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체는 주권자의 수에 따라 1인 통치(군주정), 소수 통치(과두정), 다수 통치(민주정)로 구분이 되는데, 위험 분산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군주정의 한계가 부각되어 보인다. 어쨌건 군주 또한 육체를 가진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질병에 의해 고통을 받고, 또 사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군주가 국가 정치에 끼치는 실질적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군주의 질병이 갖는 파급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강한 권력을 지닌 군주는 그만큼 강력한 권위가 필요하며,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약점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권위를 세우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공적인 전제군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한 군주의 개인적인 요소에 의해 국가가 흔들리지 않도록, 군주 교체의 유연함과 군주가 교체되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5)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은 아일랜드를 지원하는 것이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인식을 조장하였다. 영국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경제였다. 바로 식민지에서 최대한의 자원을 쥐어짜 낮은 가격으로 수탈하여, 은행가들과 지주들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었다. 런던 타임즈에는 "아일랜드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돈을 써 봤자 금덩이를 진창에 버리는 것만큼이나 가치가 없는 일이다."라는 의견까지 올라왔다. 재무부장관은 "기아와 고난의 역경을 거치지 않고서 아일랜드인들이 번영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66쪽)
사람의 숨은 성품은 아주 편한 상황이거나 아주 불편한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질병은 사회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및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 사회가 품고 있는 부조리한 구조들이 질병이 확산될 때 더 잘 드러난다. 감자마름병에 의해 감자라는 작물의 수확에 타격을 입었을 뿐인데 아일랜드의 인구가 수백만이 줄어드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일랜드 대기근(an Gorta Mór, Great Famine, 1845-1852)을 촉발한 것은 감자마름병이 아니다. 그저 감자마름병은 감자 사이에 퍼진 전염병이었을 뿐이며, 감자의 수확량을 극적으로 줄였을 뿐이다. 진짜 문제는 감자마름병이라고 하는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경제의 착취 구조였던 것이다. 감자마름병이 아니라 비슷한 다른 것이었어도 유사한 대참사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아 문제는 여전히 인류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것이 새로운 유전자 작물을 통해서 전적으로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병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는 작물을 개발한다고 해도, 생산성이 뛰어난 작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기아를 초래하는 사회의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참사'로서의 기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불황과 농산물 가격 폭락에 의해 어느 한쪽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지고, 어느 한쪽에서는 멀쩡한 수확물들을 대량으로 폐기하는 사태를 인류는 이미 겪지 않았는가?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다"(294쪽)는 사실이다. 황열병이나 천연두의 사례에서처럼, 어떤 인종 집단은 면역을 갖추고 있고 어떤 인종 집단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전염병이 퍼진 지역에서 특정 인종 집단 내 사람들의 생사를 심각하게 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온 전염병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대거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원주민'으로서 그들이 지녔던 입지를 대거 상실하게 된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Tuskegee syphilis experiment, 1932-1972)은 미 공중보건국에서 자행된 반인권적인 사안이다. 매독의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앨라배마의 가난한 흑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걸린 병이 매독이라는 것도 알리지 않고 무의미한 대처만 하였던 연구였다. 인종차별주의와 연구윤리 위반, 의료인의 가부장적 간섭주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폭력이 집약된 이 실험은 연구행위 자체의 비도덕성만이 아니라 질병과 비도덕의 피해가 특정한 약자들에게 부과된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6)
'청결'이라는 덕목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한다. 엄밀하게는 청결이란 단순히 기분이 좋고 마는 단어인 것만이 아니라, 질병에 덜 걸리게끔 하는 유용한 대처 방안이다. 어쩌면 청결이라는 단어에 긍정적인 기분이 따르고, 불결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기분이 따르는 것은 청결이 불결에 비해 더 질병에 덜 걸리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관습적인 경험들이 심어낸 반응일지도 모른다.
청결과 불결은 의학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넘어서, 도덕적인 의미의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고 악의가 없는 상태를 마치 청결한 마음 상태인 것처럼 묘사를 하며, 이때는 주로 '정결'이나 '순결'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이와 반대로 마음에 순수하지 못한 생각과 악의가 많이 들어찬 상태일수록 마치 신체가 불결한 것처럼 여겨지며 '피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깨끗함과 더러움에 관한 의학적인 인식과 도덕적인 인식은 분명 유사한 인상을 주는 것이 많고, 때로는 그 두 가지 측면이 관련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비에 의해 관념적으로 연결된 관계일 뿐이지 의학적 깨끗함과 도덕적 깨끗함을 마치 동의어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전후 미군이 보인 매독에 대한 인식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성전파성 질환이라는 매독의 특성과 성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결합되어, 매독에 감염된 사람은 단순히 의학적으로 청결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청결한 상태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일종의 낙인이 찍힌 셈인데, 문제는 그러한 낙인은 증오와 편견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능하지만, 실제로 매독을 퇴치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낙인과 징벌을 사용한 성병 예방 캠페인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성매매의 현장,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성적인 접촉과 성병의 관계가 통계적인 상관성을 띄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토대로 도출된 개연성에 불과하지, 어떤 필연성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성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무분별한 성 접촉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7)
역사에 길이 남는 '위인'이나 '영웅'은 단순히 어떤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는 정도로 주어지는 칭호가 아닌 것 같다. 역사적으로 인상깊은 인물이란 그 행적을 통해 '체계' 자체에 변화를 준 인물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인물들이야 선악을 막론하고 많지만, 그 중에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들을 위인이나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에서 소개한 바에 따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을 위인으로 부르는 데에는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헌신적인 성품을 뛰어나게 드러낸 정도로 위인인 것이 아니라, "병원 및 간호 관리 설계의 향상과 의학 통계 사용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를 통해 공중보건을 증진시킨 업적이 뛰어남"을 인정받아 영웅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간호학 전공자들이 '나이팅게일 선서'를 외운 것은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정치인이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성품이나 매력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였는지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일회성 사업, 전시성 사업, 단발적인 이벤트들을 거대한 업적인 것처럼 자랑하면서 만족하고 마는 정치인이라면 위대한 정치인이긴 어렵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치가의 성향을 일정 부분 대중이 만드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대중은 정치가를 평가할 때 앞서 말한 시스템상의 업적을 일회성 결정보다 중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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