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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본문

작품 감상/도서

시각예술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Perihelion 2020. 5. 24. 13:54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다른 방식으로 보기』, 열화당, 2012

John Berger, 『Ways of Seeing』, 1972

 

 

 


1) 존 버거(John Berger)의 1972년 BBC 강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에세이에는 미술작품을 보는 통찰력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주의가 ◇◇주의에 이런 영향을 주었고, 양식이나 형식은..." 식의 아카데믹한 미술사학에서 벗어나, 예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습 자체에 대한 날카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짧은 책이지만 뇌에 새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다.

2) 그가 예리한 비판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데에는 제목 그대로, 다양한 방식들(Ways of Seeing)로 보기 때문이다. 미술작품, 그리고 작품과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 심리 기저에 깔린 정치, 경제, 성차,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차원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풍부하고 참신하다.

3) 그의 논의를 오늘날에 맞게 확대 적용하면 인스타그램의 저 검색 버튼이야말로 '만들어진 행복'에 대한 선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대화시킨 광고판의 최신 모델이다. 유화 전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적용하면, "'당신이 소유한 것들은 곧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4) 저자가 미술사를 보는 방식에 영향을 준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계기로 그의 글을 찾아서 보게 될 것 같다. 먼지만 마시면서 자고 있던 책을 슬슬 깨워야겠다. 또 그가 진정한 예술가 중 하나로 여기는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삶을 다룬 영화인 《미스터 터너(Mr. Turner)》(2014) 또한 빠른 시일 내에 보아야 하겠다.

 

 

<마음에 담고 싶은 멋진 인용구들>

 

1. 시각예술에 관하여 논한 에세이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11쪽)

-> 우리는 특정한 전자기파를 감각기관과 신경계를 통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선택하여 인식한다. 이는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술가가 만들어놓은 물체를 단순하게 보는 것을 넘어, 이것을 예술작품이라고 인식하며, 더 나아가 알게모르게 자기 나름의 해석을 가미한다. 예술 작품을 보는 존 버거의 시각 또한 그러하며, 그러한 존 버거의 시각을 보는 우리의 눈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사실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12쪽)

-> 그 증거들은 SNS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말 그대로의 자기 모습, 혹은 무언가의 모습이 아니라,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선택된 모습들인 것이다.

 

 원근법의 관습에서는 사물의 이러한 모습을 현실성(reality)이라고 부른다. 원근법은 두 눈이 아닌 하나의 눈을 가시적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다. 무한대의 소실점으로 모이듯이 모든 것이 그 눈으로 집중된다. 한때 우주가 신을 위해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듯이, 가시적 세계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정돈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은 자신이 상황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원근법의 내적인 모순은 신과는 달리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21쪽)
 카메라는 사물의 순간적인 모습들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든 이미지에는 시간이 없다는 관념을 깨뜨려 버린다. 달리 말하면, 카메라는 시간의 경과라는 관념을 시각적 체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그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 당신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 (...)
 (...) 원근법을 사용하는 모든 소묘와 회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메라, 특히 영화 카메라는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메라의 발명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가시적인 것은 이제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점은 즉시 회화에 반영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돼는 게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더 이상 단일한 눈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 또는 인물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23쪽)

-> 원근법은 근대적인 세계관, 곧 주체과 객체를 분리하여 관찰하며 바라보는 시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이전 시각예술과 다른 것이고, 그 이후 시각예술과 다른 것이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유산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35쪽)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39쪽)

-> 어쩌면 순수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불충분한 토대 위에 세워진 인위적인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https://www.goodreads.com/author/show/29919.John_Berger

 

2.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복장의 한 형식으로서의 누드에 관한 에세이

 

 그녀는 자기 존재의 모든 면과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을 늘 감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자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성공 여부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55쪽)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56쪽)

-> 서양화의 전통에서 여성이라고 하는 소재가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는지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역설적이게도, 문화적인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평등 요구가 서구권에서 먼저, 그리고 강하게 전개된 데에는 그러한 반작용을 강하게 촉발할만한 오랜 전통이 있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존 버거의 분석이 성차별적 전통에 근거를 두고 예술 분야에 끼워맞춘 것이라는 의혹을 품을 수 있는데, 그가 남성이 등장하는 작품, 혹은 남성 누드를 직접적으로 여성의 그것과 비교하여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벌거벗은 몸(naked)이 누드(nude)가 되려면 특별한 대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특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그 몸을 이용하도록 자극한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64쪽)

-> 입지 않은 누드야말로 복장의 한 형식이라는 통찰이 주는 문학적인 매력이 상당하다. 마치 보지 않음이 시각적 선택의 일종이고, 먹지 않음이 식이요법의 한 방법이듯이 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John_Berger

 

5. 유화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에세이

 

레비스트로스 인용(1)
 물건의 소유자 입장에서나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렇게 탐욕스럽게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서구문명의 미술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98쪽)
- 샤를 샤르보니에(Charles Charbonnier)와의 대화. Cape Editions.
레비스트로스 인용(2)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가에게 회화는 앎의 도구였을 수도 있지만 또한 소유의 수단이기도 했다. (...) 대리인으로서 화가들은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100쪽)
 단 하나만 존재하는 물건들. 미술 애호가는 자기가 소유한 그림들에 둘러쌓여 있다. 미술 애호가와 달리, 시인이나 음악을 후원하는 사람은 음악 작품이나 시 작품에 둘러싸여 있지는 못한다. (...) 그림들은 그에게 구경거리(sight), 즉 그가 소유한 물건들의 모습을 구경거리로 제공한다.(100쪽)
 진부한 작품은 서투름이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유화시대는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이 등장한 시기와 일치한다. 뛰어난 작품과 평범한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대비 혹은 대립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예술과 시장 사이의 모순에서 찾아야 한다.(103쪽)
 유럽의 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제쳐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의 모델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즉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 둔 금고.(128쪽)

-> 유화는 대상을 마치 실제로 눈 앞에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 무언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한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존 버거는 서양 유화 전통이 지닌 그러한 실체성이 부에 대한 욕망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다고 비판한다. 소유욕을 자극하고 이를 충족하게끔 하는 도구로서의 예술이 바로 유화 전통의 한계였다. 어쩌면 본격적으로 부의 증대가 이루어진 시기에 예술이 그 흐름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101쪽)
 유화를 다른 회화형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묘사되는 대상이 마치 눈 앞에 있어서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물건인 것처럼, 그 질감, 광채, 입체감 등을 표현해내는 능력이다.(104쪽)
 여전히 데생의 규범을 따르고 있지만,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림 속의 인물이 현실감을 전혀 갖지 않게 만들려고 애썼다. (...) 유화의 '실체성(substantiality)', 즉 실재하는 사물처럼 실감나게 그려내려는 유화의 속성을 블레이크는 극복하고자 했는데, 그의 이런 바람은 유화 전통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109-110쪽)
 평균 수준의 전통적 초상화들이 대체로 딱딱하고 경직돼 보이는 것은 화가의 솜씨가 모자라거나 기술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이 인위성은 초상화를 보는 방식 깊숙이 내재하는 성질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아주 가깝게 볼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멀게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14쪽)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열악한 물질적 환경에 맞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에 맞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맞서 투쟁을 하는 사람. (...) 화가가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때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가질 때마다, 화가는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다.(129쪽)

-> 화가는 예술가이자 기술자다. 화가로서의 삶을 기술자로서 살아낼 것이냐 예술가로서 살아낼 것이냐는 어쩌면 선택의 몫에 불과한 것일수도 있지만, 한명의 화가 또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타성과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으로 내적인 투쟁을 전개한 화가들이 있으니, 존 버거는 이들을 위대한 예술가라 부른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유화의 실체성을 극복하고자 투쟁했고, 그의 작품에는 그러한 세계가 들어가 있다. 존 버거가 이러한 투쟁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그러한 투쟁이 잃을 것이 없는 안전한 투쟁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감당해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https://www.apollo-magazine.com/berger/

 

7. 선망을 자극하는 광고에 대한 에세이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들은 그들을 매력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무관심하게 관망하는 것이다.(154쪽)
 광고를 보는 구매자들은 그 광고의 상품을 구입하면 이루어질 수 있을 법한 자신의 모습을 부러워하게 된다. (...)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155쪽)

-> 일상에서 광고는 매우 흔하게 접하는 것이라 그것이 우리 주위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오늘날에는 미디어의 발달에 의해 그러한 현상이 더욱 강해졌는데, 이러한 광고에 대한 통찰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반갑다. 무엇보다 광고가 단순하게 제품의 장점을 나열하여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심리의 깊숙한 어떤 부분을 자극한다는 점을 포착한 통찰이 인상적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행복이 결국 선망받는 매력이며, 이는 자족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술작품은 또한 물질적인 관심보다 우월한 문화적인 권위 및 위엄의 한 형식을 암시하며, 심지어 지혜의 한 형식까지도 암시한다. (...)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물품을 사는 일이 사치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가치있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157쪽)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시각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 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161쪽)

-> 인류 역사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취는 꾸준히 있어 왔지만, 오늘날 그러한 성취들이 상업 광고에도 적극 활용된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고 나서는 단순하게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허상에 가까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충족하는 활동이 마치 고상하고 숭고한 의욕에서 나온 것인 양 포장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존 버거는 이에 더해 광고가 그저 예술을 도구로 활용할 뿐임을 넘어, 광고가 애초에 유화의 전통으로 앞서 설명한 바 있는 그런 시각예술의 흐름의 일부라는 점을 우리가 상기하게끔 이끈다.

 

 유화는 소유주가 자신의 소유물들과 생활방식을 통해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164쪽)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165쪽)

-> 불만은 누구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불만을 만들어내고, 그 불만의 근원을 개인에게로 가둬놓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는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내기에 안성맞춤의 사회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171쪽)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173쪽)
 광고는 계속 연기되는 미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현재를 배제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생성과 발전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다. 광고 안에서의 경험이란 불가능하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광고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177쪽)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찾거인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희망이 한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178쪽)

-> 광고는 단순히 개인의 소비생활을 왜곡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따라 개인의 삶을 개인이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의 괴리를 만나 좌절하게 된다. 이 빈틈을 광고가 아무렇게나 침투하게끔 방치하지 말자! 광고에서 자극하는 욕망 이외에도 세상에는 가치있는 것이 매우 많다.

 

 

 

https://www.penguinrandomhouse.com/books/324430/ways-of-seeing-by-john-ber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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