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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상태여도 실존은 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La Peste)』 본문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 『페스트』, 문예출판사, 2012
Albert Camus, 『La Peste』, 1947
1)
1940년대 어느 4월 16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에 사는 의사 리외가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보았고, 그것은 흑사병(페스트) 창궐의 전조였다. 이듬해 2월까지 페스트는 도시를 뒤덮었으며, 이 소설은 그 전염병의 기간 동안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의사 베르나르 리외(Dr. Bernard Rieux)
도시를 덮친 페스트 현장의 최전선에서 전염병과의 투쟁을 한 오랑의 의사. 병을 치료하면서 환자와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던 그였지만, 가족과의 생이별을 거부하는 환자 가족이 잠금 문 앞에서 피로를 느낀다. 그럼에도 밤낮없이 페스트와의 싸움을 이어나간 것은 그의 마음에 어떤 형이상학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가 맞닥들이는 현실 자체가 의사인 그를 움직인 것이다.
장 타루(Jean Tarrou)
페스트 발발 얼마 전에 오랑에 도착해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으로, 이것저것을 일기로 기록하면서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도덕적인 열정과 사명감을 지니고 있으며, 페스트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내는 데에 헌신을 했다. 그의 내면은 그가 어릴 적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큰 영향을 준 결과이며, 어쩌면 그의 사명감이 힘을 공급받는 원천이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도 페스트라고 하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랑베르(Raymond Rambert)
타지에서 온 기자인 그는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봉쇄되자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연인이 있는 파리로 탈출하려 동분서주한다. '내 도시'가 아닌, 그저 일 때문에 온 오랑, 파리에 사는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오랑.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관점에서 그가 탈출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굳이 그러한 자기의 생각을 논리를 들어 변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마음 속에 다른 목소리가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조제프 그랑(Joseph Grand)
오랑 시에서 공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여가시간에 라틴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쓰는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책을 쓰고 싶어하는 나머지 책 집필이 첫 문장을 좀처럼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가 쓰고자 했던 책과는 달리, 그의 인생에는 좌절된 승진, 빠듯한 삶, 떠난 아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자원 봉사 팀에서 통계 기록을 담당하며, 조용하지만 용기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코타르(Cottard)
뭔가 비밀스런 분위기인 그는 자살시도하는 장면에서 건져지는 모습으로 등장을 한다. 경찰 조사를 받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한다. 전염병으로 인한 위기의 시국에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하여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 그래서일까, 페스트의 유행이 사그라지려 하니 오히려 그런 현실을 부정하면서 정신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행태를 드러낸다.
파늘루 신부(Father Paneloux)
지역에서 존경을 받는 예수회 신부인 그는 강경한 성향의 설교로 알려져 있는데, 도시를 덮친 페스트를 하나님의 재앙인 것으로 설교를 하며, 페스트가 주는 신앙적인 의의를 역설한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보면서 그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긴 듯하다.
2)
세상은 내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 뜻에 반해서 움직이는 일이 더 많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러한 세상에 적응한 것이리라. 마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2007)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Anton Chigurh)를 보는 듯하다. 어떤 그럴싸한 당위도 없이, 그저 지나가는 곳마다 치명적인 상처 혹은 사망자들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사람이 대량으로 죽는 전염병에 과학은 인과 분석을 제공할 뿐이지, '그래서 내가, 내 가족이, 내 주변이 이러한 재앙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사람들은 전염병이나 전쟁, 자연재해, 역사의 흐름,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자란 가족과 같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에 지배를 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것은 무언가에 의해 던져진(피투: 彼投, Geworfenheit) 돌과 같은 존재다. 그저 던져진 방향대로 날아가고, 그 도중에 어딘가에 부딪히고 깨지고 파손되어 갈 뿐이다.
일종의 감금 상태를 딴 종류의 그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무엇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합리적이다.
- 대니얼 디포 (책 도입 부분에 제시된 인용)
전염병을 통해 일종의 감금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 아주 적절했다는 느낌이 든다. 운명에 던져지고 이리저리 치이는 사람의 인생은 감금된 공간 안에 한정되어 살아가는 이미지와 어울린다. 무엇보다 '감금'이라는 말이 적절한 것은 이 책이 단지 흑사병이라고 하는 특정한 전염병에만 국한되는 상황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부분에 있다. 전염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독자들은 전쟁, 자연재해, 국가에 의한 폭력,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과 같은,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던져버리는 그 무엇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버지니아주 노예로 던져지지만 누군가는 스포츠스타로 던져진다. 누군가는 존경받는 예술인으로,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식민지 소시민으로 던져진다. 개인의 뛰어난 성취와 숭고한 정신이 아무리 빛난다고 한들 밤하늘에 빛나는 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별이 아무리 빛나봤자 밤하늘은 어둡고, 오히려 밤하늘이 어둡기 때문에 별이 보이는 것이다.
3)
재화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화란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내 지나가버리는 악몽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가 항상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계속되며,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이다. 특히 휴머니스트들이 맨 먼저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 몸을 보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가 있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47쪽, 1부)
이처럼 외관상으로는 시민들에게 포위된 상태로서의 연대책임을 강요하고 있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을 파괴하고 개개인을 고독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188쪽, 3부)
이와 같이 해서 모든 일은 그야말로 최대한의 신속성과 최소한의 위험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아마 적어도 초기에는 가족들의 자연적 감정이 이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페스트가 유행하는 기간에는 그러한 감정의 고려를 염두에도 둘 수가 없었다. (...) 먹기 위해서 줄을 서고 수속을 밟으며 서식을 갖추는 데 골몰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서 어떻게들 죽어가고 있는지, 또는 앞으로 자기들이 어떻게 죽어갈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던 물질적 곤란이 나중에는 하나의 혜택이 되어버렸다.(192쪽, 3부)
그 시기부터는 사실 곤궁이 공포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늘 볼 수 있었고, 위험성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194-195쪽, 3부)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초기에서와 같은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없고,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일종의 빈약한 이성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199쪽, 3부)
사실 이 감금이라는 것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취해진 아주 합리적인 방침이다. 도시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고, 환자를 격리하는 등, 일종의 '거리두기'를 실시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활력 있는 일상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에 적응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전과 같지 않은 일상에서 사람들은 그에 맞게 자신의 이성과 감정을 적응시켜나갔으며, 이전에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상황을 괴로워하는 데에도 점차 소홀하게 되었다. 주어진 것에 적응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전염병과 같은 '감금'이란 개개인이 막아낼 수 있을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4)
랑베르
"(...)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것은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179-180쪽, 2부)
랑베르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229쪽, 4부)
하지만 아무리 감금 상태라고 해도 거기에 그저 적응해나가기만 한다면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단어로만 존재하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감금에 대해,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카뮈의 책 중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1951)의 제목과 같이, 인간은 주어진 것에 반항을 할 수 있고, 또 반항을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변화를 만들어낸다. 리외와 타루 등을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은 페스트 상황 속에서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나름의 헌신을 해나간다.
여기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등장인물 랑베르와 파늘루 신부의 변화다. 도시가 봉쇄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오랑을 탈출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된 랑베르는 불법적인 수단으로 탈출을 감행하고자 하지만, 그 뜻이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는 와중에 리외를 비롯하여 전염병 상황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또한 변하게 된다. 파늘루 신부는 마치 세상과 분리된 상태에서 타락한 세상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정죄하는 태도의 설교를 하였지만, 실제 눈 앞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보고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윽고 전염병에 맞서 투쟁하는 현장에 '자기 자신을 던진다'.
인간은 던져진(피투)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와중에도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선택하고 결단하여 실천할 수 있는, 그러니까 '스스로를 던질(기투: 企投, Entwurf)' 수 있는 존재다. 거대한 홍수와 같아서 개인이 저항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전염병 상황임에도 기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던지는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대와 참여라고 하는 실존주의적 가치를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랑베르와 파늘루가 변화하는 데에 있어 '주어진 상황'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랑베르의 불법적인 탈출 시도가 한번에 성공했다면 그의 마음이 이렇게 바뀌게 되었을까? 파늘루 신부가 수도원에서만 있어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목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변화하는 이들의 결단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누군가는 결단을 하고, 누군가는 회피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결단에 의혹으로만 대처하기보단, 응원의 태도를 준비한 채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모여서 반항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변화를 반드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작중 페스트는 그냥 왔던 것처럼 그냥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어진 것에 휩쓸려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반항조차 없다면 인간이 자유를 주장하면서 천부인권이니 하는 특권을 말하는 것조차 민망해진다. 그렇기에 거대한 흐름 앞에서 '반항'이라는 번역어가 아주 적절하게 느껴진다.
5)
이름도 없는 구덩이에 허망하게 묻혀버리거나 불 속에서 녹아 없어진 사람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어머니, 배우자, 연인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320쪽, 5부)
(...) 즉 인간에게는 경멸당할 것보다도 찬양받을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두기 위해서 말이다.(334쪽, 5부)
시내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환호성을 들으면서 리외는 그러한 기쁨이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몇십 년간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잠자고 있을 수가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헌 종이 같은 것들 틈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가지고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쪽)
"코로나 이전의 일상은 없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요즘이다.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라는 말은 COVID-19이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잠시 왔다가 가는 여행자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이 오기 전과 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상황과 비교를 하며 더욱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대해 알베르 카뮈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설교에 그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이 책을 더욱 인상깊게 읽을 수 있었다.
6)
그 외 인상깊은 부분들
전쟁 중 한 사람의 사망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란 죽는 것을 누가 봤을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역사를 통해서 뿌려진 1억의 시체라는 것은 상상 속의 한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48쪽, 1부)
딴 곳과 마찬가지로 오랑에서도 시간과 반성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13쪽, 1부)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 잠을 잔다. 그리고 또 그 시간은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지없이 소유하고 싶다거나 또는 완전히 독점하기 위해서는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두고 싶은 것이 애처로운 애정의 거창한 욕망이기 때문이다.(122-123쪽, 2부)
"그러나 이런 망할 놈의 병은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속으로는 걸려 있단 말입니다."(127쪽, 2부)
그러나 필자는 차라리 아름다운 행위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악에게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114-115쪽, 3부)
"뿐만 아니라 나는 페스트 안에 있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왜 내가 그것을 저지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군요."(174쪽, 2부)
신문 보도에 따르면, 현 정세의 현저한 특징은 시민들이 보여준 '냉철과 침착의 감동적인 실례'였다. 하지만 꽉 막혀 있는 듯한 도시에서, 무엇이고 비밀이 될 수 없는 그 도시에서 현청이 제시하는 '실례' 따위에 속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259쪽,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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