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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하는 연민을 넘어서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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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하는 연민을 넘어서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Perihelion 2020. 9. 21. 15:58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Susan Sontag,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

 

 

 

영화 《버드맨(Birdman)》(2014)의 한 장면으로, 수전 손택의 어록이 나타난다. "A THINGS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1)

 영화 《버드맨(Birdman)》(2014) 덕분에 알게 된 작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책을 읽게 되었다. 자국에 대한 무궁한 자긍심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미국인인 손택은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America was founded on genocide)",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The quality of American life is an insult to the possibilities of human growth)"와 같은 독설을 통해, 미국을 무조건적 애국이라는 환각으로부터 깨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현실 참여적이며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이든 두드러기든 무엇인가 반응을 이끌어내는 매력이 있다.

 

 

Tyler Hicks, "TALIBAN EXECUTION", 2001


2)

... 도덕적이었던 매그넘의 선언문은 윤리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예전보다 확대된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사명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59쪽)

 

 이 책이 쓰여진 당시는 발칸반도에서 인종학살이 자행되던 1990년대 중반,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은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 열을 올리던 한창이던 때였다(독서모임을 9.11에 한 것은 우연인가?). 인간을 향한 인간의 폭력과 이에 따른 고통은 사실 언제나 있어왔다. 중요한 것은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수전 손택은 이러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각매체들(회화, 사진, TV 등)의 역할에 주목한다.

 

 

Eddie Adams, "Saigon Execution", 1968


3)

 타인의 고통에 우리는 얼마나 민감한가?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30초짜리 국제뉴스의 순간으로만 소비되는 연기처럼 흘려보내고만 있지는 않은지, 짧은 동정의 탄식으로 끝내고 마는 우리가 아닌지 수전 손택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폭력을 외면하게 되는 인간 심리의 경로는 다양하다.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것이 당장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내 일'이 아니라서 외면하게 된다. 또는 게임이나 영화와는 달리, 이게 진짜로 일어나는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외면하게 된다. 혹은 내가 신경을 써봤자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 또한 외면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범람하는 매체가 의해 폭력과 고통에 자주 노출되면 그러한 자극에 싫증을 느끼고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우리는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고통에 대해서 단순 연민을 넘어선 실천적인 대안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나의 편리가 누군가의 고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세는 사소하게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67쪽)

 

 

George Strock, "Dead Americans at Buna Beach", 1943

 


4)

 전쟁 사진&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는가? 공개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공개할 수 있는가?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최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대중에 공개된 전쟁의 실상이 준 파급력은 상당했다. 권력에 의해 선전되는 전쟁의 이상적이고 숭고한 가치가 아닌, 현장에서 신체가 절단되거나 불구가 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직접 겪지 않고도 전쟁의 참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전 손택에 의해 독일의 아나키스트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Ernst Friedrich, 1894-1967)를 알게 된 것은 상당한 수확이다. 그는 1923년 베를린에서 <국제반전박물관 Internationales Anti-Kriegsmuseum> 및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Krieg dem Kriege!』을 통해 전쟁의 결말이라는 것이 비참하다는 것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특정한 종교의 것인 것처럼 여겨지는 듯하지만, 에른스트 프리드리히의 사례와 같이 '아나키즘'이라는 정치 사상으로도 가능하다(물론 종교와 정치 사상, 윤리 등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다만 죽음의 과정을 여과없이 공개할 것인지, 주검의 모습이나 죽은 이의 얼굴이 공개되어도 괜찮은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대중들의 알 권리와 진실로서의 전쟁의 참상을 공개하는 일은, 공공의 질서와 도리, 당사자의 가족 및 친지의 권리와 충돌하면서 깊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한편으로 과거의 '인종전시회'와 같이, '비유럽'으로 규정된 이들을 피사체로 한 이미지가 보다 쉽게 공개되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르완다에서 벌어진 투치족 학살의 시체 사진들, 시에라리온 내전 희생자의 사진들, 그 외에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그리고 이 책에서 사례까지 언급되진 않았지만 아시아,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일들을 찍은 사진들을 기억하자. 이러한 사진들을 통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곳'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곧 식민주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함부로 '그곳'은 동떨어진 곳이며, 미개하므로 비극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폭력이란 그 형태를 달리하여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Joe Rosenthal,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1945
Yevgeny khaldei, "Raising a Flag over the Reichstag", 1945


5)

 사진은 회화와 같은 다른 시각예술과는 달리 사실 그대로를 기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시각예술과 사실기록 사이에서 촬영자는 선택을 하게 되며,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할 때 "아름다운 것의 비진정성"이라며 종종 비난을 받게 된다. '보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과 영상을 조작하는 일이 일상화된 요즘에는 그러한 비난이 더욱 쉽게 일어날 것이다. 상업광고에도 예술이 접목되는 와중에, 예술적이면서 사실적인 사진은 정녕 불가능할까?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74쪽)
프랑스 군인들이 그림에서 그려진 것과 정확히 똑같은 잔악 행위를 스페인에서 저지르지 않았다(그러니까 그들의 희생자가 정확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나무 옆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해서 『전쟁의 참화』가 지닌 품격이 손상될 일은 결코 없다. 고야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종합이다. 그 이미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이와는 대도적으로, 한 장의 사진이나 영상 필름은 카메라의 렌즈 앞에 놓인 것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한다. 사진은 뭔가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는, 사진이라는 것이 회화 등에 비해서 사실을 더 잘 잡아낼 수 있다고 해도,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어떤 구도를 통해 찍는다는 것은 곧 그 외의 것은 배제된다는 의미니까. 이에 보정기술, 사진에 붙는 부가적인 설명 구절 등을 통해 하나의 사진이 줄 수 있는 메시지나 인상, 감정은 사진 그 자체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게 된다. '사실적인 사진'이니 '사진을 통한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기루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초창기 전쟁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은 사진들이 배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84쪽)
... 그렇지만 정작 이상한 일은 ... 그 사진들이 연출됐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이다.(85쪽)
... 제 아무리 사진은 무엇이다, 혹은 사진은 무엇이 될 수 있다, 라고 정교하게 말할지라도, 우리는 재빠른 사진작가가 이제 막 진행되고 있는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을 포착해 놓은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만족감을 결코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다.(87쪽)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90쪽)
실질적으로, 잘 알려진 사진들이 연출되지 않을 채 찍히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이다. ... 베트남 전쟁 이래로 연출된 전쟁 사진이 거의 없어지게 됐다는 사실은 사진작가들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을 지니게 됐다는 점을 말해준다.(90쪽)

 

 

 

 

 

 

6)

 그 외 인상적인 구절들과 사진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65쪽)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103쪽)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어떤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때때로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125쪽)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131쪽)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166쪽)

Jacques Callot - "Les Misères et les Malheurs de la Guerre", 1633
Jacques Callot - "Les Misères et les Malheurs de la Guerre",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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