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진실과 증거의 간극 사이에서 - 도진기, 『판결의 재구성』 본문
도진기, 『판결의 재구성』, 김영사, 2019
1)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을 접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사가 사람이냐?" 등이 흔하다. 대중의 그러한 반응이 나오는 데에는 그럴 법한 맥락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판결문이라는 것은 그런 기본적으로 이유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판사 출신 저자는 그러한 판결들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논리성이라는 틀로 파헤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보이는 판결들 속에 '정상적인 이유'가 있거나, 엘리트 집단이 써낸 판결문에서도 덜 논리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일견 이상하게 보이는 판결이란 무조건 부정의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사안들
1부
2004년 사라진 변호사 사건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
2010년 낙지 살인사건
2014년 캄보디아 아내 보험살인 의혹 사건
2016년 시흥 딸 살인사건
1998년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1995년 김성재 살인사건
2010년 부산 시신 없는 살인사건
2003년 동두천 암자 살인사건
2015년 공릉동 살인사건과 2014년 도둑 뇌사 사건
2011년 역삼동 원룸 사건
2017년 약물로 아내 살해한 의사 사건
2부
2008년 훈민정음 해례본 사건
1992년 《즐거운 사라》 사건
2016년 조영남 화투 그림 사건
영화 속의 담배와 칼, 욕설
2010년 서울역 노숙자 방치 사망사건
2014년 셧다운제 결정
2015년 대법원 이혼 '유책주의' 판결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폭탄
2015년 KTX 승무원 대법원 판결
3부
2017년 불법촬영 무죄 사건과 미란다 원칙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1992년 김순경 살인 누명 사건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
2013년 인천공항고속도로 사망사건
앵커링 효과와 재판의 형평성
양승태의 상고법원 추진
1999년 대구 어린이 황상 테러 사건
2)
상식으로는 뻔하게 유죄인데 법이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죄인이 단죄받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부조리감이 속을 뒤집지만, 우리의 법체계는 '100명의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범을 처벌한다'는 것보다는 '100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을 선택했다. 단순한 숫자 비교라고 하기에는,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나 '요시다 암굴왕 사건'이 주는 울림을 도저히 무시할 수는 없다. "법은 감정의 제국이다."(228쪽) 당신은 억울하게 징역살이를 하거나 사형 판결에 처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자신이 없다. 무고한 사람이 내가 아닌 누군가라고 생각할 때와, 그 무고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선택하게 되는 원칙은 다르다.
물론 이 원칙도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건에 따른 증거의 수집 가능성과 사회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하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는 있어 보인다. 지금과 비교하면 분명 이전 시대에는 과학기술 등의 이유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현실이 있었다. 그렇기에 정황증거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증거재판주의가 덜 엄격하게 지켜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증거재판주의를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지키려는 요즘이라 할지라도 이전 시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가령 물적 증거의 수집 자체가 어려운, 특수한 양상의 '성 관련 사건' 등에서는 물적인 증거가 다소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진술이나 정황에 의존하여 판결을 하는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혹은 형사재판에 비해 증거를 덜 엄격하게 다루는 민사재판에서의 배상 문제도 그렇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엄존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역직관적인 판결문을 도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식적인 원칙들이다. '증거재판주의', '무죄추정의 원칙', '적법절차의 원칙' 등은 물자체를 알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로부터 기인하는 법 사상가들의 고육지책인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 곧 물자체로 아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인식할 때 자신의 사고의 틀로 '구성'하게 된다. 곧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앎이라는 것은, 경험이라는 재료를 바탕으로 나름 변형해낸 결과물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내가 아는 것이 물자체라는 보증은 없는 셈이다. 어떤 인간도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나마 공소시효 제도의 변화 등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법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사법 시스템의 기초다."(296쪽)
인간에 대한 무한 신뢰가 가능한 곳이라면, 그곳은 사법 시스템 자체가 필요가 없는 천국일 것이다. 하지만 현세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 필요한 곳이다. 사법 시스템이 기초로 하는 인간 불신이라는 것은, 엄밀하게는 인간 인식에 대한 불신인 것이다. 악의적인 거짓말이든 착각에 의한 것이든, 인간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합리적인 의심에 힘을 실어주는 사법 체계의 원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제1조(각급 법원 판사의 수) 「법원조직법」 제5조제3항 본문에 따른 각급 법원 판사의 수는 3,214명으로 한다.
4)
판사의 과중한 업무량이 초래할 수 있는 판결문의 질적 저하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을 깊이 숙고하지 못하는 판사, 환자 한명을 세심하게 돌보지 못하는 의사와 간호사, 학생 한명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두지 못하는 교사… 개인을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야 알고는 있지만, 언제 그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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