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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권력이다 - 로버트 파우저, 『외국어 전파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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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권력이다 - 로버트 파우저, 『외국어 전파담』

Perihelion 2020. 10. 23. 16:53

 

로버트 파우저 저, 『외국어 전파담』, 혜화1117, 2018

 

 

1)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활동을 하고, 기타 여러 언어들을 섭렵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소통의 즐거움을 재료로 삼아 언어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여주는 그는 여러 언어를 배우면서 알게 된 '언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역사들'을 우리에게 흥미롭게 전해준다.

 

 


2)

 오늘날과는 다르게 예로부터 언어의 전파는 말보다는 글을 위주로 전개되었다. 문자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 기능만이 아니라 종교 교리의 이해 및 왕권 확립을 위해 쓰였고, 종교의 전파와 왕권의 범위가 넓어지는 정도만큼 널리 확산되었다.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라틴어가 전파되었고 그 흔적이 지중해 및 유럽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기독교의 공인 이후 중세의 교황의 권위만큼 라틴어의 '고급 언어'로서의 지위는 견고했다.

 

 이는 오늘날의 언어 전파의 양상과 비교해보았을 때 흥미로운 부분이다. 오늘날에는 정치 권력이나 종교 외에 경제, 학술, 문화 등 다양한 이유에 의해 언어가 전파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전파의 요인이 다양해졌을 뿐이지, 분야별로 권력의 격차에 의해 특정한 언어가 우위를 점하는 현상만큼은 여전한 모습이다. 가령 영국인 생명공학 전문가가 한국인 학자와 교류하기 위해 굳이 한국어를 배울 동기를 느끼지 못하듯이 말이다. K-pop의 팬인 브라질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확인하기 쉬워도, 한국의 K-pop 팬이 브라질의 포르투갈어를 배운다는 상상을 하기 쉽지 않듯이 말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놓고 보면 흥미롭다. 인도 일대에서 시작된 불교가 산과 물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산스크리트어가 중원에 널리 퍼지지 않은 점이 그렇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하여, 기존 중국의 사상인 도교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토대로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다른 언어에 다른 생각이 깃들기 때문에, 기존의 도교나 유교 용어로는 불교의 진의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힘들었고, 이에 따라 교리에 대한 오해나 논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법사(法師)인 현장(玄奘, 602-664)이 직접 인도에 가서 원서 불경들을 가지고 직접적인 번역을 하게 된다. 이후 중국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 불교가 중국을 잠식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불교가 중국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는 사상 전파의 강한 힘이 외부로부터 밀려든다 하여도, 이를 받아들이는 곳의 '힘', 그러니까 그것이 문화적이든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언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기존 언어 자체가 대체되거나 변화되기보다는 이에 부합하도록 외부의 것들을 변형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3)

 언어가 권력의 중추인만큼, 권력은 언제나 언어를 주고하고자 노력했다. 사전의 편찬, 공교육 체계를 통한 언어의 보급 등은 인류애적 동기보다는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의 국가가 여러 언어로 나뉘어 있으면 하나의 힘을 내기가 어렵다. 여러 언어를 병기해야 하는 공문서, 표지판, 교육은 추가적인 비용을 초래할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하나의 생각으로 묶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특유의 역사적인 이유와 지리적 여건에 의해 여러 언어를 인정하는 연방제 중립국인 스위스 같은 나라가 아니고서는 국민 만들기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언어적 통합 없이 정치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독립된 언어를 지닌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여러 국가들을 떠올려보자. 고립어인 바스크어를 사용하는 바스크인들과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카탈루냐인들은 에스파냐어를 쓰는 카스티야의 스페인 중앙 정부에 독립을 요구한다. 나치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혹은 과거 프로이센의 영향력에 있던 지역에서 독일어 사용자들이 분포한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초기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주류 언어'로부터의 배제는 곧 권력으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은 '내선일체'라는 이름 하에 일본어를 강요하는 일본의 체제로부터 소외된 채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여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각지의 조선어를 수집하고 보존하고자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했던 조선어 학외의 노력은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학술적인 독립운동이기도 했으며, 이를 탄압한 '조선어 학회 사건'은 그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또 미국에서는 오랜 시간 노예 취급을 받아온 흑인들에 대해 영어 교육이 배제되었다. 이들은 한때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선언상으로는'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은연중의 취급(가령,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는 판결) 때문에 배제되었다.

 

 반대로 권력의 보다 중심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그 권력의 언어를 배우고자 한다. 신라인이 당나라인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 한국인이 미국인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가 모두 이러한 경우다. 분야별로 주류가 되는 언어는 다양하겠지만,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언어는 단연 영어다. 엄밀히는 잉글랜드의 영어도 아니고, 스코틀랜드의 것도, 캐나다의 것도, 호주의 것도, 뉴질랜드의 것도, 나이지리아의 것도 아닌 미국의 영어다.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 학문 등 온갖 영역에서 초강대국이자 선도 국가로서의 지위를 미국이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인의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노력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제는 그런 노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도 없을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됐다. 이쯤 되면 English가 아니라 American이라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4)

 교양수업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이때 프랑스어 특유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지만, 완벽한 언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더 강하게 느꼈다. 어느 언어든, 엄밀히 말해서 자연어라면, 그 언어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쌓아놓은 '습관'에 의한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문법을 정돈한다고 해도 그 습관의 범위 안에 있다. 불규칙한 동사의 변형, 숫자를 세는 방식, 문법에 성별이 포함된 경우 등등... 그렇기에 특정한 언어를 우월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저 우연히 발생한 습관을 숭상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에스페란토 상징

 

5)

 에스페란토(esperanto)라는 인공어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권력과 언어의 본질을 간파한 통찰력과 더불어 인류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취지가 돋보인다. 국가주의에 의한 역사적인 탄압과는 별개로, 에스페란토는 그 태생에서부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낸 인공언어라 할지라도, 사람이 만들어낸 이상 그 바탕은 자연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럽 언어에 토대를 둔 에스페란토 역시 습득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시간, 노력 등)에 있어 차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한국어와 같은 고립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어 학습은 어렵다.

 

 에스페란토, 혹은 이를 계승한 다른 보편어 운동은 바벨탑을 재건하려는 꿈에 그칠 것인가? 혹은 언어의 다양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새로운 언어간 동등성을 구축해야 할 것인가?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에: Ludoviko Lazaro Zamenhof, 1859-1917, P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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