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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삶의 배신 - 브룬힐데 폼젤 저, 토레 D. 한젠 편, 『어느 독일인의 삶(EIN DEUTSCHES LEBEN)』 본문
성실한 삶의 배신 - 브룬힐데 폼젤 저, 토레 D. 한젠 편, 『어느 독일인의 삶(EIN DEUTSCHES LEBEN)』
Perihelion 2020. 10. 24. 15:55
브룬힐데 폼젤 저, 토레 D. 한젠 편, 박종대 옮김, 『어느 독일인의 삶: 괴벨스 비서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열린책들, 2018
Brunhilde Pomsel, Thore D. Hansen, 『Ein Deutsches Leben: Was uns die Geschichte von Goebbels Sekretärin für die Gegenwart lehrt』, 2017
1)
브룬힐데 폼젤의 삶을 비롯해 그녀가 괴벨스의 비서로 일했던 시대로부터 뽑아낸 현재와의 유사점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312쪽)
괴벨스(1897-1945, Paul Joseph Goebbels)는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1939-1945)으로 악명이 높은 나치당(Nazi, 국가사회주의자당)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전쟁의 위해 독일 국민의 지지를 결집하는 과정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계몽주의를 파괴하고 인종주의와 결합된 민족주의로 독일인들을 몰고 갔던 그의 선전, 선동과 정부 정책을 미화하는 방법들은 현재까지도 대중 선전(propaganda)의 대표적인 예시로 알려져 있다. 나치 독일의 핵심인 그는 나치 독일의 패망하는 1945년 5월 1일, 곧 히틀러의 사망 하루 뒤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괴벨스의 밑에서 일했던 비서들 중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 1911-2017)이라는 인물이 있다. 타자 작업 등 나치 권력의 실무를 담당했던 폼젤은 오랜 세월이 지나 2013년과 2014년에 뮌헨에서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인터뷰에 담게 된다. 이 인터뷰는 다큐멘터리로, 그리고 책으로 제작되어 우리에게 나치 독일과 가까웠던 생존자의 증언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때로는 생생하고 솔직하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굴절된 나치 시기 생존자의 관점을 우리는 만나볼 수 있다. 1945년에 종결된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정치, 경제, 사상, 예술, 교육 등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여파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단순히 과거에 종결된 과거완료형으로 단순하게 파악해버려선 안 될 것이다. 브룬힐데 폼젤의 인터뷰와 이에 대해 작가 토레 D. 한젠(Thore D. Hansen, 1969-)의 평론은 과거에 대한 '무시'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나치 시절의 일들은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일시적인 광기 정도로 치부해버릴 수 없다. 오늘날에도 과거 나치 독일의 광풍을 불러일으킨 씨앗들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브룬힐데 폼젤과 잉게보르크 라포포르트의 이야기는 파시즘이, 그리고 사람들의 무지와 수동성, 무관심, 기회주의가 독일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직접 경험한 세대의 어쩌면 마지막 경고라는 점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시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엔 괴짜 얼간이 정도로 무시하면서 침묵했다. 그러다 너무 늦어버렸다. (307쪽)
차례
(굵은 글씨: 폼젤의 인터뷰 부분)
서문 - 토레 D. 한젠 9
1 우린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 1930년대 베를린의 한 젊은 여성 23
2 한마디로 히틀러는 새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 제국 방송국으로의 진출 51
3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 제국 선전부로의 비상 91
4 몰락의 순간까지도 충성을 - 선전부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155
5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 수용 생활과 새 출발 179
6 난 책임이 없어요 - 백세 노인의 총평
괴벨스 비서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 토레 D. 한젠 223
감사의 말 315
옮긴이의 말 - 탈진실 사회에 대한 경고 317
2)
하지만 나처럼 베를린 근교의 좋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궁핍과 가난이 판치던 시절에도 그런 특별한 지역이 있었던 거죠. 우린 그런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외면해 버렸죠. (54쪽)
그때까지 우린 괴벨스의 그런 면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 행사에는 간 적이 없었으니까요. 우리에겐 큰 충격이었죠.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당혹감만 남았어요. (138쪽)
<외면>은 브룬힐데 폼젤의 생애를 꿰뚫는 키워드와 같다. 그러나 그녀 혼자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 정당들도 민주주의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 그들에게는 사회 전체에 대해 책임질 용기와 정당들의 경계를 넘어 협력할 각오가 부족했다. 정당 간의 싸움이 거대한 사회적 문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288쪽)
브룬힐데 폼젤의 인터뷰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나치 독일의 등장을 유발한 것으로 여겨지는 주요 키워드는 '정치적 무관심'과 '외면'이라고 할 수 있다. 폼젤은 나치 독일이 정권을 잡는 과정이나 집권 이후 행보에 대해 어떤 윤리적인 평가를 하지 않은 채로 당시를 살아왔다. 그저 자신의 직업,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삶이었으며, 직업적인 발전을 위해서 기회를 잡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있어서는 나태하기보단 오히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을 해낸 사람이다. 폼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일로, 폼젤의 무관심은 공공의 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실히 일했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당시엔 다들 그렇게 성실했어요. 나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121쪽)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사회적인 악의 초래에 일조하였다는 점은, 라인홀트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영역에서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이 속한 사회는 비도덕적인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사회가 비윤리적인 길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해법을 도모해야 한다. 전통적인 군주 국가에서라면 현명한 군주가 세워지는 일에 엘리트 귀족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 체제에서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폼젤은 사회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일에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그러한 많은 독일인들의 갈 곳을 잃은 '힘'은 선동과 선전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나치 수뇌부들에게는 아주 유용하고 쉬운 도구가 되었다.
항상 자기 자신의 성공과 물질적 안정만 생각하고, 사회적 불의와 타인에 대한 차별에는 둔감한 수백만 명의 폼젤은 여론을 조작하는 권위적인 시스템의 견고한 토대다. 그렇기에 이들은 극우 정당들의 과격한 고정 지지자들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18쪽)
1930년대 독일, 곧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 1918-1933)이 기틀이 덜 잡힌 국가였기 때문에, 혹은 독일 국민들이 특히 순응적인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식의 설명은 과거로부터 오늘날의 교훈을 얻기에 특히 걸림돌이 된다. 1930년대의 독일은 오늘날에 어느 국가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재현될 수 있다. 민주정을 기본 체제로 삼는 국가라 할지라도 정치적 외면과 무관심이 일반화된 사회, 대중들이 '자발적 우민화'를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경계를 해야 한다. 우리의 사회는 어떠한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폼젤의 시대에 보였던 씨앗들이 우리의 사회에서 자라지 않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도저히 그렇지가 않다.
3)
우리 일의 대부분은 당연히 전선 상황이나 제국 안의 사건들을 완화하고 미화하는 일이었어요. 객관적인 사실을 상부 지시에 따라 우리 쪽으로 좀 더 긍정적으로 고쳤다는 말이죠. 그게 국민 계몽의 원칙이었어요. 국민은 계몽되어야 했으니까요. 사실 그전 정부들도 항상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해왔지만, 어쨌든 그게 나치의 원칙이었어요. (145-146)
지금 우리는 터키에서 독재 정권이 어떻게 탄생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세계의 눈들이 볼 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대통령 일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야당과 의회, 언론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브룬힐데 폼젤 같은 단순한 공무원과 일꾼들이다. (239-240)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인터넷을 통하면 기자들 없이도 얼마든지 여론을 조성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와 동시에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즉, 주류 언론을 <거짓말쟁이 언론>으로 줄기차게 매도하는 것이다. 거짓말쟁이 언론은 요제프 괴벨스가 자신의 비판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자, 나치당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순수한 민족의 뜻과 상반되는 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 2016년 독일에서 올해의 말로 선정된 <포스트팍티시Postfaktisch>는 거짓말과 선동의 확산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오래되고도 새로운 전략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259-260)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흐름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몸부림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유라는 이상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박탈당한 주변인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워가고 있었고, 이 틈을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파고드는 모양새다. 그런데 그 모습이 1930년대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기존 언론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 작업으로서의 '포스트팍티시(postfaktisch)'는 오늘날 SNS를 통해서 손쉽고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가짜 뉴스'라는 이름으로 이슈가 되었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득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기존 언론에 제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위 SNS 소식통, 평론가들이 지목하는 언론의 편향성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 간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러니 대중의 입장에서는 어느 편의 뉴스가 더 신뢰할만한 것인지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양자를 합리적인 관점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기 생에 치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쉽지가 않다. 더욱이 논쟁적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지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양자를 고루 검토하여 종합적인 의견을 내는 것보다는 '무관심'의 형태로 도피하거나, 기존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입장을 선택하고 생각을 정지하고야 만다. 서로가 자신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강화하는 일에 관성적으로 매달리기만 해서는 합리적인 토론과 자기 극복이라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고, 이러한 상황의 극단화는 보다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기가 쉬워진다.
이러한 상황은 터키에서 서아시아 지역의 난민 문제, 국제무대에서의 정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정권의 출현을 비롯한 현실들에 관심을 갖게 한다. 난민 이슈를 놓고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 폐쇄적 민족주의가 부활하였으며,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극우적 포퓰리스트들이 선거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표를 얻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왔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를 자랑으로 삼던 프랑스에서는 르 펜 부녀가 각각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까지 진출했으며, 자유주의의 상징을 자처하던 미국에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폐쇄적 정책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가 최초의 흑인(사실은 흑-백 혼혈) 대통령 다음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저 반세기도 더 전에 있었던 역사적 유물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현실이다.
예전에도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위대한 사회를 꿈꾸었지만, 이상의 빛만을 바라보며 방심하는 와중에 반계몽주의적 반발로서 파시즘을 키워냈다.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의 시기 동안 대대적인 복지를 내세우던 시대 또한 변화하는 시대에 제도를 보다 정교화시키지 못한 틈을 타서 큰 역풍에 직면했다. 오늘날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보다는 보다 대중 교육, 민주시민교육이 잘 된 사회라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100년 전에 비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할 것이다.
4)
히틀러 취임 직후엔 한마디로 그냥 희망이 들끓었어요. 히틀러가 정말 정권을 잡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했어요.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죠. 아마 그 사람들 자신도 깜짝 놀랐을 거예요. (57쪽)
아무튼 난 남들보다 지내는 형편이 괜찮았어요.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죠. 쫙 빼입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 그래요, 난 그 시절 껍데기로만 살았어요. 어리석게도요. (119쪽)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생활 수준과 삶의 질 면에서 자신들의 부모를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뿐 아니라 따라가지도 못할 것을 염려하는 첫 세대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편으론 분노와 증오가, 다른 한편으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체념이 생겨난다. 정치 참여로도 자신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거라는 체념이다. (279쪽)
경제적 결정론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경제적인 토대가 결정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1930년대 당시 파시즘이 출현하던 당시의 경제적인 여건과 오늘날의 그것을 비교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방치하는 등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책적인 무리수가 대중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고, 기존 정치세력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키우는 꼴이 되었다. 이 틈을 공산주의자와 국가사회주의자라는 양 극단이 침투하여 들어왔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사회주의자당, 곧 나치당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임에도 승전국들 사이에서의 낮은 지위 등으로 인해 이렇다 할 전리품을 챙기지 못했으며(애초에 전쟁 배상금을 할당받았어도 그렇게 많이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정치의 혼란과 함께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통일 과정에서 형성한 민족의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무솔리니에 의해 파시즘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오늘날의 세계는 어떠한가? 전후의 급속한 발전 이후에 점점 더 완만한 곡선을 그려가는 선진국들의 경제성장은 가계소득으로 즉각 분배되지 않고 성장률과 물질 문명의 진보에 대비되는 개인의 삶을 양산해냈다. 인용문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경제력의 상위권에 있는 국가들의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불확실성을 보다 크게 느끼며 좌절하게 되었다. 해결될 기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청년층의 실업률은 청년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관심과 참여의 불을 지피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안위에 집중하도록 개인들을 더욱 다그친다. 이에 더해 사실상 껍데기뿐인 능력주의의 구호들은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개인적 인성의 문제로 호도하여 개인들을 더욱 채찍질하게 만들고, 이윽고 번아웃하게 만든다. IMF 사태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용어들, 예컨대 웰빙, 힐링, 헬조선, 욜로 등의 단어들은 개인의 삶으로 천착하면서 자꾸만 지쳐가는 대중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어느덧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책들이 유행하던 시대가 지나고 그저 지쳐서 누워 있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모습을 표지로 삼은 책들이 서점의 신간 코너들을 점령하고 있다.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감정은 반사적으로 희생양을 찾게 하고, 좀 더 신속하고 단순한 대답을 갈급하게 만든다. 이성적으로는 제어가 안 되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다. (287쪽)
결국 현재 관찰되는 국민 상당수의 극우화는 난민 문제가 불거지기 한참 이전에 이미 약자들에 대한 연대감을 상실한 사회의 무지와 무관심이 부른 결과다. 브룬힐데 폼젤 역시 자신의 시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히틀러 이전 궁핍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문제들은 외면했다고. (292쪽)
이러한 때에 소외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과거에 기득권자를 부르주아로, 적으로 규정한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다른 민족이나 이방인들을 설정하여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파시스트가 되기 쉬워지는 시대가 있었다. 이때 규정된 적에게 행해야 할 것으로 타도와 말살 이외 다른 것, 공존이나 합의와 같은 것들은 없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서아시아에서, 콩고나 르완다 등 아프리카에서, 멕시코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중남미 지역에서, 태평양에서 환경적인 문제들로 인해서 발생각 각종 난민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안착할 수 있는 모국이 없고 어딜가나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외에도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병합된 소수민족이나 이민이나 취업 등으로 생겨난 이주민 등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나라 안에서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의 책임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테러리즘이나 다문화적 어려움이 이러한 문제들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계층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자유 민주주의적 엘리트들의 무관심과 오만도 우익 포퓰리스트들에겐 또 다른 비옥한 토양이다. 왜냐하면 극우 세력에게 투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고 무식한 집단으로 욕하는 자유 민주주의 엘리트들의 자극적인 반응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위의 것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떨어져 나간> 유권자들의 항의와 민주주의적 시스템의 위기에는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오만함도 일부 책임이 있다.
(...)
대학 교육을 받고 웬만큼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하층민들이 이주민과 다른 소수자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것을 경멸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주민들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걱정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서 출세나 경제적 안정을 두고 이주민들과 경쟁해야 할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세계화의 잠재적 낙오자들은 우리 국경 앞에 늘어선 난민들만큼이나 노동청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297-298)
이방인이라는 약자들에 대해 가혹해져가는 사회는 국내의 약자들을 향해 가혹해져가는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중산층이 축소되고 더 많은 계층적 약자들이 양산되는 이러한 사회에서 자기 이외에 존재들에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기는 점점 어렵게 된다. 자기 이외에 다른 약자들에게 편견과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모습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시선이 점점 광범위해져가는 현실에 대해서 단순히 비난으로 대응해서는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진다. 토레 D. 한젠의 언급처럼, '너그러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왜 그럴 수 없느냐면서 경멸에 찬 시선을 던져봤자 그것은 자기 처지에 대해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무지에 따른 경멸일 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도덕적 우월성을 소유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을 쉽게 경멸해버리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더 배워야 할 것이 많은 태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난민이나 이주민에 관련된 인권 문제를 단순하게 감상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꼴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 관심의 영역이 어떤 것이든지 이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혹은 점점 어려워져가는 약자 문제 전반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구호를 넘어서 약자에게 가혹해져가는 사회의 구조 자체에 주목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본인의 처지가 점점 어려워지거나 개선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입장대로, 너그러울 여유가 있어서 자신이 관심을 갖는 어려운 어떤 집단에게 연민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대로 함께 논의하고 협동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5)
우리는 집에서 자연스럽게 순종을 배웠어요. 가정 안에서 사랑과 배려 같은 건 부족했죠. 오히려 우리는 순종하는 가운데 서로를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을 통해 원래 아이들에게는 없던 특성이 우리 속에서 깨어난 거죠. (30쪽)
우리는 대부분 정치에 무관심했어요. 나는 요즘 여학생들이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쩜 이렇게 달라졌을까? (48쪽)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해요. (...) 그에 비하면 예전의 우리는 바보였어요.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는 건, 그래요, 일단 서민들한테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먹고살기 바빠서요. 반면에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에 둔감했어요. (...) 옛날에는 선거가 참 많았는데, 그때마다 우린 부모님이 어디다 투표했는지 알고 싶어 했어요. 그러면 항상 <너희하곤 상관없는 일이다!>하는 대답이 돌아왔죠. (210-212쪽)
약자에 대한 관대를 지닌 사회, 약자 점차 중산층으로 편입되어가는 사회, 타자에 대한 관용을 실천할 여유가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폼젤의 증언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복종을 가르치는 사회보다 합리적인 의견 형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 사회의 교육의 현장에서, 그러니까 학교의 수업이나 평가의 영역에서 그러한 합리적 의견 형성과 교환을 충분히 지원해주고 있는가? 일생의 많은 부분을 살아가는 직업의 현장에서는 그러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어가고 있는가? 삶의 토대인 가정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결정되고 지지되고 있는가?
개인은 모두 어딘가에 소속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당연해요. 그리고 어디 소속되면 항상 영향을 받아요. 일부는 교육을 통해, 일부는 자신이 속한 그룹을 통해서요. (204쪽)
6)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책임에 대한 문제만큼은 스스로 답을 일찍 찾았어요. 그래요,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요,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나도 물론이고요. (208쪽)
->
이 입장은 당연히 옛날이건 지금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결정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 물론 폼젤은 철저한 국가 사회주의자는 분명 아닌 듯하다. 그녀는 개인적인 어리석음과 순진함을 자기 보호의 수단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녀의 책임 문제는 적극적인 동조와 적극적인 외면 사이에 걸쳐 있다. 도덕적으로 보자면 외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233쪽)
돌아보면 그렇게 험악한 시절을 지나온 건 참 힘든 일이었어요. 결국 남은 건 내 삶이자 내 운명뿐이었어요, 결국엔 다들 자기 자신만 생각했죠. (...) 그래요, 난 그 끔찍하고 추악한 일들을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겪은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조차도 항상 잘 견뎌냈죠.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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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룬힐데 폼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녀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군데군데 있다. (...) 폼젤은 어떤 끔찍한 일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본인 입으로 상세히 밝히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알 수가 없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던 것뿐이다. (229쪽)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모든 과정을 잘 극복해 온 건 당연히 기뻐요.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일이 흘러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랬더라면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도 갖지 못했겠죠. (168쪽)
결국 브룬힐데 폼젤은 자신이 책임질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불과하며, 그저 자신 또한 피해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부과되지 않고, 그저 민족이라는 전체의 뒤에 숨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도피를 하려는 발언에 불과하다. 그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다는 항변에서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4)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악의 평범성'이라며 비판했던 것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인가? 민족이라는 전체의 그늘에 숨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인가? 한젠의 말처럼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알 수가 없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던 것뿐이다." 그저 외면한다고 해서 도덕적인 책임이 해결되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자율이니 자유니 하는 것을 주장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뿐이다. 외면할 자유만 있고 직면해야 할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입장에선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어요. 나치에 대항할 수는 없었느냐고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어요.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예도 충분했어요. 나치가 저지른 일들이 엄청난 범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확실히 깨닫게 되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 당시에는…… 우린 모두 나치 선전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고, 완전히 말려들어갔어요. (182쪽)
다만 '이미 개인으로서는 어찌 해볼 도리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억압적인 사회가 갖춰지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까?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있어도, 그 상황 속에 이미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개인에게 너무나도 큰 짐을 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오늘날의 북한이나 중국 등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젊은 세대의 상당수에게는 일상적 생활의 중심지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하다. 그에 대한 완벽한 무대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플랫폼을 가진 인터넷이 제공한다. 이것들은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자아도취적 연출의 허기를 달래준다. (278)
그런데 민주주의의 수호는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그런 게 있기나 한다면 말이다) 온라인 청원을 통해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온라인 청원과 같은 활동은 젊은 세대의 이미지, 즉 스쳐 지나가듯이 잠깐 참여하고 마는 이미지에 어울린다. 그것은 오히려 쾌락주의적 소비 형태의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280)
1992년 독일에서 올해의 말로 선정된 이 <정치 혐오>는 무지와 무관심의 또 한 형태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로는 결코 정치인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283)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저 온라인 청원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적 소비를 넘어, 정치 혐오라는 이름으로 도피해버리고 마는 태도를 넘어야 한다. 그 방향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에서의 합리적 의사소통이든, 여러 계층과 직능의 사회적 대타협과 협동이든,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든, 생태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든, 변형된 공리주의적 태도든, 롤즈식의 정의 접근이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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