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조 장치
누구나 상상은 하지만 아무나 하진 못하는 -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2014 본문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2014
1)
89세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조병만 할아버지는 서로의 인생 76년을 공유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에도 두 분의 애정은 시작된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낙엽, 개울물, 눈으로 하는 가벼운 장난을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곳에서 미소와 웃음이 올라오니, 화려한 기교로 만들어진 대사나 상황이 주는 웃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누구든지, 혹은 지금 당장 그러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이런 노부부의 모습으로 상상으로 그려내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 그러한 상상을 한다고 해도 누구나 그러한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정도만큼이나 그러한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행복한 노부부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과도 같이 느껴진다.
2)
긴 세월만큼이나 좋은 순간들과 함께 슬픈 순간들이 많기 마련이다. 거의 반세기 전에 어린 나이로 떠나보낸 자식들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마음 속에 묻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가득한 사랑으로 살아온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중간중간에 생길 수밖에 없는 이런저런 상처들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3)
노부모를 모시는 일로 언성을 높이는 자식들의 모습을 목도할 때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 노부모의 봉양을 놓고 자식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것은 제법 흔한 일이다. 그게 흔한 일이라고 해도 그걸 보는 당사자로서의 부모의 마음이란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과 같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그게 생신잔치 자리에서 나온 장면이라 더욱 그렇다. 한편으로는 자식들 사이에서도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서운함이 파낸 마음의 골이 깊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 아래에서 커온 것은 같으나, 누가 더 노력을 했느냐 누가 더 고생을 했느냐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상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고, 누군가 했을 고생을 알아주려 하지 않으면 원망의 목소리가 무르익을 때까지 그런 고생이 느껴지지도 않은 채로 살 것이다. 이상하게도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평화적인 대화를 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막상 오래 알고 지낸 가족 사이에는 그게 더 안 되는 모양이다.
4)
할아버지는 결국 노환으로 인해 먼저 떠나시게 된다. 노년의 세월을 오랜 기간 보내시면서 이별의 순간이 올 것임을 미리 안다고 하여도, 자꾸만 깊어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강아지 떠나보내는 데에도 눈물을 흘리시던 두 분의 이별이라니.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만큼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즐거움과 사랑이라는 '현실'에 마지막 순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니 적어도 그 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다.
5)
부부의 사랑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에 피할 수 없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를 먼저 떠올리면서 시작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나는 그냥 어린애에 불과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살면서 어려움이야 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서 피하기만 하려고 하면 그만큼의 행복을 얻어낼 가능성도 별로 없어진다. 나무를 심으면 병충해를 입을 수도 있고 손해를 떠안아야 할 수도 있지만, 나무를 심지 않으면 달콤한 과실을 얻어낼 수 없다.
'작품 감상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의 눈에 비친 홀로코스트 -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0) | 2020.10.27 |
---|---|
아이 같이 순수하고 싶었지만 -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Baby Driver)》, 2017 (0) | 2020.08.20 |
난 너의 디딤돌이 아냐 - 영화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The High Note)》, 2020 (2) | 2020.06.17 |
부품이 된 인간의 좌절 - 영화 《아버지의 초상(La loi du marche)》, 2015 (0) | 2020.06.09 |
우리들의 일그러진 선생님 - 영화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Ucitelka)》, 2016 (0) | 2020.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