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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의 파괴는 존재를 파괴한다 -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본문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문학과지성사, 2014
1)
'모멸'은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을 의미하고, '모멸감'은 그 모멸스러움을 느낌을 말한다.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격하당하는 느낌을 대단히 싫어하고, 심지어는 그 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정도의 느낌마저도 받는다. 실제로 모멸을 느낀다고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나,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무의미감이 주는 파급은 그만큼이나 중대하게 다가온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어?" 모멸이 불러오는 폭력과 파괴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새 주목을 받는 '혐오'만큼이나 걱정해야 할, 사회적으로 만연한 감정이 바로 이 '모멸'이다.
2)
모멸감은 예로부터 있어왔겠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적인 신분제가 없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념으로 주입당하지만, 그 이념을 강력하게 내면화할수록 동시에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괴로움을 크게 느낀다. 이념적인 나에 비해 격하된 현실의 내가 받는 대우에 좌절하고, 민감하게 되고, 심지어 그런 대우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느끼기까지 한다. 혹은 내가 일정 정도의 지위나 명성 혹은 재산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신분의식으로 내면화하여 붙들고자 한다면 이 또한 모멸의 단초가 된다. '불안'이나 '뒤쳐진 존재', '쓸모가 없어짐' 등 현대인들은 사회관계 속에서 모멸감의 토대가 되는 감정들을 쌓아가고 있다. 최근 이와 관련된 책들이 자주 등장하고 널리 읽히는 점이 인상적이다.
3)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이지만, 그가 모멸감이라는 사회 현실을 상당히 공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아직 경험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규명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사회과학을 전공했음에도 모멸을 겪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과 기분을 이해하고자 하며, 이를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점이 이 책의 인상적인 부분이다. 고전이나 소설 등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상당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도 생각해본다.
4)
결국 모멸감도 일종의 감정이고, 더군다나 본능적이라기보단 사회적인 것이므로, 그 해결의 근원은 결국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 있다. 나 자신의 마음부터 바로선다면 과도하게 모멸을 느껴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나에게 모멸을 주고자 하는 충실한 의도가 담긴 언행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세 번째 해결책인데, 물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역시 저자가 제시한 제시한 팍팍한 사회 현실 개선하기, 특정 기준으로 인간의 귀천을 나누는 의미체계 혁파하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5)
이 책은 특이하게도 작곡가와 협업을 한 산물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데, CD도 함께 빌릴 것이냐고 묻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알고보니 글을 쓴 저자의 텍스트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작곡가, 그리고 함께 한 연주자들이 음악의 형태로 구현해낸 것이다. 물론 책 말미에 작곡가의 말처럼, 음악은 추상성이 매우 강하기에 창작자가 의도한 내면적 의미를 청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모멸감이라는 감정 자체에 주목하여 이를 음악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시도 자체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해당 연주는 책에 포함된 CD 혹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JXFihUThSu8nsKB_FXxvcw/fea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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