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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옷을 입은 인간의 욕망과 죄악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본문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맥베스』, 민음사, 2004
William Shakespeare, 『The Tragedie of Macbeth』, 1606
1)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 책은 동명의 스코틀랜드 국왕의 일생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극중 맥베스는 친구 뱅코와 함께 전공을 세우고 귀환하다 마녀의 에언을 듣게 된다. 이에 따라 맥베스는 왕이 될 것이며, 뱅코의 자손들도 왕이 되리라는 내용이다. 처음에 믿지 않던 맥베스였지만 예언이 점점 현실화되자 그에 사로잡히게 되고, 끝내 던컨 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그러나 뱅코에 대한 예언이 두려워 뱅코를 죽게 만들고, 잔혹한 통치를 하며 미쳐간다. 이미 영혼이 파멸해버린 맥베스, 결국 던컨 왕의 아들 말콤 및 맥더프의 군대에 의해 육체마저도 파멸당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2)
맥베스는 명백한 살인자요 찬탈자이지만,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와 같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 초래한 희생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마녀들의 예언을 피할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고, 맥베스 부인은 그로 하여금 '거친 남성성'을 가질 것을 요구하며 악을 부추긴다. 결국 그는 악행과 양심 사이에서 점차 미치게 되는데, 이전의 악을 덮기 위해 새로운 악행(살인)이 반복될수록 그 증상이 심해진다.
이러한 미침은 죄악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반응과 괴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정상적인 삶이 제약되고 파괴당하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에게도 고귀한 영혼과 인간성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그렇기에 그에 대해 동정심을 품을 수 있다. 우리 인생의 큰 흐름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이 내가 받아들이기 싫은 결말을 내포하고 있을 때, 인생의 배역을 충실하게 연기할 뿐인 배우로서의 나 자신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그 옛날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은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태도를 고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으나, 끔찍한 결말을 알면서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자체가 우리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능이나 경향성, 감정 및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결국 멕베스의 이야기가 단순한 권선징악이 아니라 비극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말은 이러한 사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겠다.
3)
운명을 신적인 존재가 풀어내는 실타래로 설명하는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의 운명은 수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이 물질이라면 그 정신도 미래도 모두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하리라는 믿음이다.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객관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물리법칙과는 별개로 자유로운 의지를 소유하고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여전히 놓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맥베스의 악행을 악한 의지와 결부시켜 설명되며, 그가 비난의 화살을 받을만 하며, 그가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판단이 우리의 상식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 악인에게 동정심을 품을 수는 있지만, 악행은 배격해야 한다. 양심이 있는 맥베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양심을 저버린 맥베스의 행동을 우리는 비난한다.
4)
맥베스는 사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예언이니 유혹이니 하여도 본인에게 그러한 욕망의 씨앗이 없다면, 혹은 본인이 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멕베스는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괴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정상적인 군주이고 싶었으나 비정상적인 군주였고, 건강한 인간이고자 했으나 병적인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자아성찰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모순과 위선이 드러나고 이에 괴로움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과 당장의 나의 모습 사이에서 드러나는 간극과 이로 인한 좌절, 불안, 모멸 등의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다. 맥베스의 상황과 직접적으로는 다르지만, 그 본질상 다르지 않은 축소화된, 변형된, 현대화된 맥베스의 상황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현대인들도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는가? 여담이지만 심지어 그 이상적인 자아를 타인의 현실에서 찾으려고 할 때 더욱 비참해지고야 만다.
5)
명작은 서로를 이어주며 만난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비극에 빠져 파멸하고야 마는 모습에서 오이디푸스를 볼 수 있다. 또 멕베스는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서 난 인간(man)에게 파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다가, 다리 사이가 아니라 '배를 가르고 나온(제왕절개)' 맥더프에게 죽는데,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이를 비틀어 등장인물 중 하나가 '남자(man)'이 아닌 '여자(woman)'에게 최후를 맞이하도록 설정한다. 그리고 아내가 죽을 때 멕베스가 외친 말들은 영화 《버드맨》에서 길거리의 어떤 사내가 독백하는 장면으로 인용되었다. 그 내용을 떠올리면, 남이든 자신에게든 인정받아야 채워지는 자존감과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고전인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명작끼리의 연결을 발견할 때 재미를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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