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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Pissing이든 Pi든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본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1) 왜 책으로는 몰랐을까?
얀 마텔(Yann Martel)의 『파이 이야기(Life of Pi)』라는 책을 2014년에 읽었다.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라 읽게 되었는데, 당시 기억으로는 기묘한 설정과 함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는 정도로 독서를 마무리했다. 맹수와의 조난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인간의 의지와 투쟁 … 그냥 그 정도로 읽었다.
사실 나는 소설이 어렵다. 엄밀하게는 글로 된 작품을 볼 때, 시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그 부분이 어렵다. 시각적인 만족감은 대단히 좋아하지만, 내면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식하는 것과 내 안에서 관념으로 떠올려야 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이론이나 사상을 직접 ‘말하는’ 글은 매우 읽기 편하고 금방 재미를 느끼지만,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의 추진력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저자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글이라는 매질을 통해서 나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내 두뇌에서 힘겹게 출력을 하면서, 저자의 생각이나 의도, 삶에 선사하는 의미까지 구성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어려운가!
사실 이건 당시 나의 얕은 독서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책들은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쉽게 내 내면으로 투영할 수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경우는 그저 일상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인데도 군 생활 경험으로 인해 대단히 친숙하고 수월하게 읽지 않았는가 말이다.
6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전의 독서가 심각하게 얕았음을 알게 된 것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덕분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껴지는 것들은 이전에 소설을 읽을 때 얻어냈던 피상적인 감상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안 감독과 CG팀 등 제작진의 훌륭한 능력 덕분에 나는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생산해내야 하는 수고를 덜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작품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 두뇌를 더 활용할 수 있게 된 걸까? 아니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때처럼, 지나간 시간 동안 축적한 경험들이 그런 고찰을 하는 힘을 키워준 것일까?
2) Incredible: 믿어지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거나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양에서의 표류를 겪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파이에게 웬 작가가 찾아온다. 작가는 “내가 신의 존재를 믿게 할 이야기”를 파이 당신이 들려줄 것이라 해서 왔다고 설명하고, 이에 파이는 식사를 대접하면서 “믿을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표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물원을 하던 가족이 바다 건너 나라로 떠나려 하는데, 중간에 배가 침몰했다. 주인공 파이는 구명보트에 의지하면서, 위험한 호랑이와 같이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신비하고 환상적이면서 위험한 여정을 지나서 끝내 살아남은 스토리. 구조 후에 일본인 직원들이 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자, 파이는 구명보트에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시체 훼손, 심지어는 식인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포함된 이야기를 한다. 결국 선박회사 직원은 호랑이 이야기를 채택한다. 이 정도가 내가 본 소설로서의 『파이 이야기』다.
사실 파이가 처음 들려준 이야기는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이미 태평양에서 조난당해서 생존한 것 자체가 기적인데, 구명보트에 호랑이가 타고 있는 상황인데도 생존을 하다니. 호랑이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다. 게다가 미어캣이 우글거리는데 밤에는 담수가 위액처럼 변하는 섬, 기이한 섬인데도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지도에도 없는 그런 섬이 있을 수 있는가? 대항해시대 초기도 아닌데 무슨 아틀란티스 같은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잔인하고 비정하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느낌은 있다. 대양에서 조난을 당한 후에 구명보트에서 벌어지는 살인, 시체 훼손, 심지어는 식인에 이르기까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윤리적으로는 용납하기 싫다고 외쳐도 역사적으로는 각각의 사례(증거)가 있지 않은가?
단순히 믿을 수 없는(작중 대사로는 “incredible”)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짓은 전파 낭비, 종이 낭비,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나마 영화판에서는 영상미가 워낙 뛰어나서 시각적인 쾌락, 아이맥스로 못 봐서 아쉽다라는 감정이라도 남았지, 소설판에서는 남는 것이 뭐란 말인가? 호랑이가 타고 있고, 미어캣이 어쩌구 하는 얘기 들을 바에는, 어차피 픽션인데 생존 이야기를 들으려면 『로빈슨 크루소』를, 상상력 가득한 판타지를 알고 싶으면 『반지의 제왕』을 읽는 편이 낫다.
2014년의 나에게 아쉬움이 있다. 읽으면서 이때 의문을 품고 의심을 했어야 했다.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현실성’을 놓고 보면 두 번째 이야기가 더 그럴싸하게 느껴지지만,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것은 첫 번째 이야기라는 점이다. 심지어 등장인물인 파이,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 직원과 작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선택’한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다.
사실 바다에서 표류했던 파이가 생존했고, 그가 가족을 잃었으며 고통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확실한 것은 없다. 두 이야기 모두 파이의 진술 외에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어쩌면 호랑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살인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제시된 이야기들 중에 두 번째 이야기가 보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결국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알기는 어렵고 다만 본인이 선택하고 믿는 것일 뿐이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보았을 때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걸 믿기로 선택한 사람은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믿음의 토대가 되는 최소한의, 그러나 가장 중대한 것을 믿기 시작하면 그 이후의 것들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성공회 변증가인 C.S.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의 네 번째 성분 내지 요소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한 유대인이 태어나 자신이 바로 자연에 출현했던 그 두려운 존재이자 도덕법을 부여한 존재의 아들이라고, 또는 그 존재와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워낙 충격적인 주장―역설적일 뿐 아니라 기괴하기까지 해서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쉬운 주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관점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유형의 미치광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에도 지금도 자기가 주장한 바와 일치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그 밖의 내용들―이 사람은 죽임을 당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의 죽음은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두렵고’ ‘의로우신’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에 진정하고도 유익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또한 믿을 만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 C. 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고통의 문제』, 32-33쪽, 홍성사, 2002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 C. S. 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순전한 기독교』 「제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충격적인 갈림길” 中, 홍성사, 2001
결국 파이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온 작가는 ‘기괴하고 이성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이는 일’과 ‘충격적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은 일’ 중에 하나를 믿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고, 전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 보였던 작가의 표정이다. 첫 번째 이야기를 듣고는 믿기 어려운 특이한 일이라는 반응을, 두 번째 이야기를 듣고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작품 속 작가도, 일본인 직원들도 ‘믿고 싶은 것’을 믿었고 그에 따라 사실관계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이야기를 들려준 파이 본인 또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는 표류에서 막 생존한 젊은 파이와 중년을 보내는 듯한 나이의 파이가 살짝 다르게 묘사된다. 젊은 파이는 막 구조 후 얼마 안 되어 일본인 직원들에게 두 이야기를 모두 설명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를 설명할 때는 비교적 담담하게, 두 번째 이야기를 설명할 때에는 감정이 격해지고 눈물을 흘린다. 반대로 세월이 지난 파이는 첫 번째 이야기를 추억할 때 눈물을 흘리고 두 번째 이야기를 제시할 때 비교적 담담해진다. 어쩌면 파이 본인도 무언가를 선택했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만 이 또한 열린 결말이니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기 나름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Piscine Molitor Patel)이다. 프랑스어로 풀장을 의미하는 Piscine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아버지 친구의 추천을 받아 갖게 된 이름이다. 어린 시절 동급생들은 Piscine을 발음이 유사한 영어 pissing(오줌싸기)으로 바꿔 부르면서 놀린다. 이에 파이는 자기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가장 순수하게 이성적인 수학 용어인 Pi(π, 원주율)로 자기 자신을 재정의한다. Piscine이 pissing이든 π든 그것 또한 믿음의 문제다.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 pissing이라며 놀리는 것도, π라고 자부심을 갖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믿음이다. 원작의 저자가 많은 수학 용어 중에서 무리수에 해당하는 π를 선택한 것도, 가장 이성적인 학문의 용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열린 결말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다.
3) 믿음과 이성의 관계
작품 속 작가든, 일본인 직원들이든, 파이 본인이든, 단지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라면 진실에서 도망친 것이 아닌가? 파이 본인이야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았으니 정신적인 건강을 위한 방어기제로 그런 환상을 꾸며낸 것이라면 동정의 여지는 있겠다. 어쨌거나 그런 선택은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흔히 과학의 역사에서는 종교적인 믿음이 이성을 억압한 사례들이 천동설-지동설 논쟁과 같이 극적인 방식으로 전해지고는 한다.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비이성적인 차별과 억압의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상에 대한 믿음, 특정한 사실관계에 대한 믿음이 다른 믿음을 촉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앞서 말한 것과 유사한 일들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스콜라 철학에서와 같이 믿음이 이성을 옹호하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건 이성 또한 피조물이 가진 능력 중에서 훌륭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때로는 믿음을 위해, 곧 자신의 신앙을 드높이기 위해 이성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성과를 내기도 하고, 믿음을 토대로 이성을 전개하기도 한다. 물론 믿음과 이성의 관계가 단지 종교적인 믿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천동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면서 화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이성적인 노력들, 양자역학에 대한 불신을 토대로 이성적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아인슈타인의 사례 등이 그렇다. 이와 같이 이성과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양자택일로 볼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일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지 종교적인 의미의 믿음을 넘어서, 믿음이라는 것 자체와 이성이라는 것 자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암시를 한다. 파이는 어릴 적부터 힌두교 문화권에서 자라 힌두교 신자이기도 하면서, 기독교의 교리에 감화를 받아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힌두교도이면서,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의미에서 직업적으로는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애초에 이게 말이나 되는가? 교리상 도저히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것들을 내면에 함께 지니고 있다니. 그의 아버지는 냉철한 이성주의자이지만 어머니는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부로서 둘의 사이는 좋아 보인다. 이 외에 다양하게 전개된 영화적인 상징들은 그러한 관계를 우리에게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의심은 좋은 거예요. 믿음을 유지시켜 주죠. 시험에 들기 전 까지는 믿음의 힘을 모르니까.”
Doubt is useful. It keeps faith a living thing. After all, you cannot know the strength of your faith until it has been tested.
- 중년의 파이 파텔이 작중 작가에게
책으로 얻지 못했던 통찰을 시간이 흐른 후에 영화를 통해 보충하게 되어 다행이다. 여담이지만 만약 내가 배우라면 중년의 파이를 연기한 이르판 칸(Irrfan Khan)의 얼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성과 복잡한 믿음들, 인생의 즐거움과 고통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눈빛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8년에 신경내분비종양으로 투병을 했다는 그가 작품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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