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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라는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 - 영화 《버드맨(Birdman)》, 2014 본문

작품 감상/영화

타인이라는 태양을 향한 이카루스 - 영화 《버드맨(Birdman)》, 2014

Perihelion 2020. 4. 21. 14:01

 

영화 《버드맨(Birdman)》, 2014

혹은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1)

 리건 톰슨, 과거 코믹북 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 '버드맨(Birdman)'의 주연으로 활약을 했으나, 지금은 늙어버린 퇴물 배우다. 그런 그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를 기획하고 이에 직접 출연하여 스스로의 건재함을 확인하고자 한다. 

 

 촬영 관련해서는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자연스러운 롱 테이크(Long take) 편집이 돋보인다. 촬영 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즈키(Emmanuel Lubezki Morgenstern)는 이 영화를 포함해서 《그래비티(Gravity)》(2013), 《버드맨(Birdman)》(2014),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2015)로 3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게 된다. 참고로 이 영화의 감독인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와는 같은 멕시코 국적으로, 《버드맨》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함께 했다.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두 명작 영화로 영화인들 사이에서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맛을 볼 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대사들이다. 블랙 코미디 드라마 영화가 선사하는 뼈 있는 대사 하나하나가 주는 묵직함이 상당하다. 

 

 

 

2)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자존감'이다. 그런데 여기서 '존'은 원래의 '높을 존(尊, esteem)'임과 동시에 '있을 존(存, exist)'이기도 하다. 곧 사람은 스스로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바로 그 느낌을 위해 그렇게나 분투하고, 그렇게나 마음을 쓰는 것이다.

 

<영화 서두에 등장하는 인용 구절>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
그럼에도 당신은 이 삶으로부터 얻기 원했던 것을 얻었는가?

I DID
그래

AND WHAT DID YOU WANT?
그것이 무엇인가?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RAYMOND CARVER, LATE FRAGMENT)
이 지구상에서 나 스스로 사랑받는다고 불리고, 느끼는 것
(레이먼드 카버의 시 "Late Fragment" 중에서)

 

 문제는 그 '높은 평가'의 근원이 스스로에게 없다는 점이다. 곧 '자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의 자존감은 진정한 의미에서 스스로 존중함으로써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주는 인정과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들, 요컨대 내가 한물 간 사람인지, 예술가로서 훌륭한 연기자인지, 이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좋은 아버지인지, 좋은 남편인지, 좋은 딸인지, 소중한 연인인지 등 충족감을 느끼는 여러 요소들은 모두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고 있다. 타인이 인정하는 '나'로서의 삶과 진짜 '나'가 느끼는 삶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저 남들이 인정해주면 그걸로 된 것일까?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거짓 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그러면서도 다채롭게 말해준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D OF THAT THING." -S. Sontag

2-1)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 속의 여러 장치들이 돋보인다. 리건의 거울에 달려 있는, 미국의 작가이자 평론가이며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말을 보자.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지, 다른 무언가로 불리는 대로의 것이 아니다.
-S. Sontag

 

 거울에 그러한 명언을 붙여 넣을 정도로 인상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리건은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쉽사리 뿌리칠 수 없다. 

 

 

2-2)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인정을 받았을 때 그만큼 더 짜릿한 것이지만, 그만큼 사람에게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 그가 깊은 스트레스에 짓눌릴 때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그가 과거 연기했던 버드맨의 형상과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다. 남들의 인정을 위해 몸무림을 치면 칠수록 그의 내면에는 버드맨이라고 하는 신경증적인 반작용이 커진다.

 

버드맨의 목소리

(...)
You're the original. You paved the way for these other clowns. Give the people what they want old-fashioned apocalyptic porn. 
네가 원조야. 다른 광대들을 위해 길을 열어줬어. 사람들에게 원하는 걸 줘. 옛날식의 종말론적인 포르노말야.

'Birdman: The Phoenix Rises.'
'버드맨: 불사조의 부활'

Pimple-faced gamers creaming in their pants. A billion worldwide, guaranteed! 
여드름쟁이 게이머들이 바지에 싸겠어. 전 세계 10억 달러는 확실해!

You are larger than life, man. You save people from their boring, miserable lives. You make them jump, laugh, shit their pants.
넌 비범한 놈이야. 넌 지루하고 비참한 삶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지. 넌 사람들이 방방 뛰고, 웃고, 바지에 지리게 만들어.

All you have to do is...
네가 해야 할 건...

(손가락 튕기는 리건, 때리고 부수는 블록버스터 효과)

That's what I'm talking about. Bones rattling! Big, loud, fast!
내가 말한게 이거야. 떨리도록 크게, 시끄럽게, 빠르게!

Look at these people, at their eyes they're sparkling. They love this shit. They love blood. They love action. Not this talky, depressing, philosophical bullshit.
저 사람들 좀 봐, 눈이 반짝거리잖아. 그들은 이런걸 좋아해. 피를 좋아하고, 액션을 좋아하지. 이딴 말 많고 우울하고 철학적인 헛소리 말고.
(...)

 

 

 2-3) 

  작중 리건이 연출 및 출연하는 연극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1981)을 각색한 것이다. 리건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의 내용이 그의 인생을 말해주는 듯하다.

What's the matter with me? Why do I always have to beg people to love me?
나한테 문제가 뭐야?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거지?

(...)

I just wanted to be what you wanted. Now I spend every fucking minute praying to be somebody else. Somebody I'm not! Anybody.
난 그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어. 난 어떤 사람이 되기를 매 순간 기도했어. 나 아닌 그 누군가 말이야! 누구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I don't exist. I'm not even here. None of this even matters. I don't exist. I don't exist. I don't exist.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여기에 없어. 아무 것도 상관없어.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장면)

 

 

 

2-4)

 작중 웬 남자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1606)의 5막 5장 대사 일부를 연기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맥베스가 하는 대사로 그 내용이 영화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내일, 그리고 내일, 또 내일.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하루하루 작은 걸음으로 살살 기어가네.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우리의 모든 지난 날들은 어리석은 이들에게 비추었으니

The way to dusty death.
먼지같은 죽음의 길이다.

Out, out, brief candle!
꺼져라, 꺼져라, 얼마 안 남은 촛불아!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삶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연기자니,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무대 위에서는 점잖을 빼며 안달을 내지만,

And then is heard no more;
그리고 나서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네.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그저 바보가 말하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나, 아무 의미도 없도다.

 

 리건은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다. 삶이란 발버둥치는 연기니, 리건은 연기자로서 연기를 하지만 또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연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나 허무한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그저 작은 촛불의 불꽃과 같이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인지.

 

 

2-5)

 지구의 역사를 두루마리 휴지로 비유를 해봤을 때,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 그야말로 온갖 영웅들과 아첨꾼들, 지도자와 사상가가 각축을 벌인 이 역사는 휴지 한 칸에 불과하다. 이 휴지 한 칸의 먼지 하나 조차도 안 되는 존재가 아웅다웅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얼마나 허무한가? 타인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는 그 타인을 지향하면 할수록 그 동력을 잃고 추락하기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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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히어로물 주인공 출신이자 정극 연기자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닌 리건. 주변 인물들과 맺는 상호작용을 통해 상업 작품과 예술 작품 사이의 긴장이 영화 내내 드러난다. 어느 한편은 상대를 향해 '돈만 밝히며, 예술을 죽인다'며 비난하고, 반대편은 '우울하고 재미없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볼수록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상업 작품의 힘인 대중성이 얼마나 허황된 토대 위에 있는지, 순수 예술이라는 것의 동기가 예술이라고 떠벌리는 것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제대로 풍자하고 있다.

 

 앞서 인용했던 버드맨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보자: "They love this shit. They love blood. They love action. Not this talky, depressing, philosophical bullshit.(그들은 이런걸 좋아해. 피를 좋아하고, 액션을 좋아하지. 이딴 말 많고 우울하고 철학적인 헛소리 말고.)"

 더 많은 대중들이 선택하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것,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 인간과 사회의 관계와 같이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때리고, 부수고, 화려하고, 쾌감을 극대화하는 것들을 더 많이 선택한다. 그러한 작품들에 돈이 몰리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작품들을 만드는 일에 뛰어난 인재들이 몰린다. 상대적으로 예술성은 '돈이 안 되는 것'이라는 편견과 함께 경시된다.

 

 

3-1)

 한편 대중문화가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상업성(돈을 얼마나 잘 버는가), 대중성(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가)이 얼마나 허황된 토대 위에 있는지를 풍자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소셜네트워크 시대인 지금의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Clara
Now is it true you've been injecting yourself with semen from baby pigs?
스스로 새끼 돼지 정액을 주사했다는데 사실인가요?

Riggan
I'm sorry, what?
뭐라고요?

Clara
As a method of facial rejuvenation?
얼굴 회춘을 위한 방법으로?

Riggan
Where did you read that?
그런 걸 어디서 들었는데요?

Clara
It was tweeted by @prostatewhispers.
'@전립선소문들' 트위터에 올라왔어요.

Riggan
That's not true.
가짭니다.

Clara
I know, but did you do it?
알죠, 근데 했어요?

Riggan
No, I didn't do it.
아뇨, 안 했어요.

Clara
Okay, I'll write you're denying it.
네, 당신이 부정했다고 쓸게요.

Riggan
Don't write anything. Why would you write anything?
어느 것도 쓰지 마요. 왜 쓰는 겁니까 그런 걸?

 

 애초에 '새끼 돼지 정액'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연어의 정액으로부터 추출한 성분으로 만들어낸 PDRN(Polydeoxyribonucleotide) 치료제를 피부과 및 정형외과에서 활용하긴 한다. 근데 2차 성징도 거치지 않은 '새끼 돼지'라... 출처가 불분명한 SNS 헛소문을 (심지어 계정 이름도 소문) 그대로 가지고 와서 사실인양 기사로 쓰려고 하는 기자의 행태가 눈에 띈다. 혹시 돼지에 대해 무지한 나의 착각인가 싶어서 찾아보긴 했지만 아직은 찾지를 못했다. 혹시 발견하신 분은 제보를 해주기를 바란다.

 게다가 누가 들어도 불쾌할만한 소문을 부인했더니 그걸 '부인했다고 기사를 쓰겠다'니. 물론 부인을 했으니 부인했다고 쓰는 것이 사실관계로는 틀리지 않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기사거리가 될만한 것의 중요도를 판단하는 기사의 능력과, 자극적인 기사로 조회수만 추구하게끔 만드는 언론계의 수익구조 혹은 관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3-2)

 리건의 딸 샘은 아빠에게 폭발한다. 

 

And, let's face it, Dad... You are not doing this for the sake of art, you're doing it to feel relevant again. Well, guess what? There's an entire world of people who fight to be relevant every single day! And you act like it doesn't exist.
그리고 직시해요 아빠... 이걸 하는 목적이 예술이 아니고,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다시 느끼려는 거잖아요. 그거 알아요? 의미 있으려고 싸우는 사람들 전 세계에 매일매일 널렸어요! 아빠는 그런 사람 어디 없다는 듯이 행동하죠.

 

 사실 순수하게 예술 행위를 한다고 하지만, 저마다 예술이라고 할만한 것 외에 목적이 따로 있기도 하다. 리건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인물들마다 각자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다. 애초에 순수하게 예술 활동을 하는데 관객이 많이 오고, 우수한 평론을 받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인가? 상업 영화가 활개를 친다고 한들 무슨 상관일까?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 예술 이외의 개인적인 동기가 포함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인가? 이상적으로는 예술은 예술이고 생계는 생계지만, 현실 세계에서 타인에게 받는 인정과 사랑은 곧 윤택한 삶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심한 경우에는 타인의 인정이 없이는 예술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애초에 '순수한 예술'이라는 것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자체가 불분명하다. 고대에는 훌륭한 기능적 탁월함을 예술 행위의 본질로 보고, 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을 '훌륭한 기술자'와 같은 정도로 취급을 했다. 물론 플라톤은 실생활의 유용함과 관련해서, 진리와의 거리에 따라서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을 상당히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이전의 예술과는 다른 '창조성'을 훌륭한 예술가의 덕목으로 보지만, 애초에 창조성이라는 것이 정확한 값으로 측정되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히 주관적이다. 리건이 마지막 행동한 이유와 이에 대해 평론가가 평한 내용이 과연 일치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 영화의 부제가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인 것이 참 재밌다.

 

 

 

 

* 영문 번역에 도움을 주신 이선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오타 및 기타 수정사항 말씀해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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